[목사] 김영훈 목사와 믿음의 과정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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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1910년에, 김영훈은 그의 고향 월화면의 교회를 돌보는 조사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1911년, 김영훈의 이름을 대동군 읍교회 시무한 교역자 이름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평북(平北) 대리회에 소속되어 있던 김영훈은 1912년 2월 15일, 평북대리회가 노회(老會)로 승격되면서 자동적으로 평북노회 소속으로 신학계속 추천을 받게 되었다. 

당시 평북노회 소속 신학생 중에는 1917년부터 중국 산동 선교사로 활동한 방효원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평북노회 소속 지역 교회에서 조사로 활동한 김영훈은 1913년 2월 19일 평북 선천읍 예배당에서 열린 제3회 평북노회 장로 안수자로 보고된다. 

김영훈은 평안북도 월화면 호암교회 장로로 안수받게 되었으며 호암교회는 비로소 당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동군(同郡) 월화면(月華面) 호암교회(虎岩敎會)가 김영훈(金永勳)을 장로(長老)로 안수(按手)하여 당회(堂會)를 성립(成立)하다”

1912년, 평북노회가 설립되던 때에 평북노회 관할지역에서 활동하던 서양선교사는 위대모, 로세영, 윤산온, 라부열, 남행리, 방혜법, 노해리 선교사였고, 한국인 목사는 13명이었다. 

호암교회 김영훈 장로는 의주 서편과 선천 북편 구역을 맡고 있던 위대모 선교사와 여러모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김영훈은 교회 장로이자 조사로 월화면 여러 교회를 돌보면서 신학생으로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신학을 배웠고, 목회 경험을 축적해 나갔다. 

1913년 6월에 김영훈 장로는 평양장로회신학교 제6회 졸업생 33명 중 한 사람으로 졸업하게 된다. 김영훈의 졸업식은 1913년 6월 12일 오전 9시에 평양신학교 예배실에서 거행되었다. 졸업식에는 평남노회가 임박한고로 각 지방에서 시무하던 목사 여러 명도 참석하고 신학교 교정과 교사들이 승좌하고 졸업생 33인이 남북으로 상대하여 열좌하였으며 북편에는 여빈이 남좌하고 동남에는 남빈이 운집하였으며 중앙석에는 신학생 193인이 열좌하였다. 

졸업식 시간이 되어 교장이 순서를 잡고 인도하는데 먼저 소안론 선교사가 하나님께 간구한 후에 찬송가를 합창하였다. 이어서 어도만 선교사의 성경봉독 순서가 있었고 졸업생 김영훈이 기도를 인도하였다. 김영훈의 기도에 이어 졸업생 일동이 찬송을 불렀으며 원두우 선교사의 강설이 이어졌다. 그리고 임시교장으로 시무하던 이눌서 선교사가 졸업장을 수여하였으며 졸업생 대표 김선두가 답사와 작별사를 하였다. 그리고 졸업식 참가자 일동이 찬송가 제1장을 부르고 마로덕 선교사의 축도로 졸업식을 마치게 되었다. 김영훈의 졸업식에는 그와 같이 중국으로 파송될 사병순 장로도 참석하고 있었다. 

김영훈 장로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준사 자격을 받게 되었고 제4회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그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을 때에 그의 선배 박태로 목사는 1913년 5월에 이미 중국 산동성으로 가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1913년 5월 26일 박태로 선교사가 산동성 위해위 강서당에서 써 보낸 선교 편지 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언어를 모름으로 답답한 때에 내가 천국 방언을 안 것과 또 오순절을 기다리며 통인정이 없음으로 답답할 때에 요일 1장 3절(‘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과 또 기도로 삼위와 때마다 통정하며 친구 생각이 간절할 때에 요한 15장 15절(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참 친구를 만나보면 또 노회 때 사진과 남녀 도사경 때 사진과 신학교 사진과 각 사진으로도 친구를 만나보고 많이 위로가 되며 동락하는 영광이 없을 때 묵시 21장을 보고 또 찬미를 부르는데, 영광 일세 영광 일세 내가 누릴 영광 일세 하고 큰 기쁨을 얻으며 이 숱한 인종을 바라보니 바윗돌 같은 마음을 어찌하여야 예수를 알게 할까 답답하던 차에 행 2장 41절(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을 보니 한 날에 3천 명 회개시키신 성신을 의지하니 참 위로가 되오며.”

박태동 목사를 산동으로 먼저 파송한 총회 전도부는 1913년 가을에 파송할 선교사 후보 2명을 물색하였고 신학교를 막 졸업한 김영훈 장로와 교섭하기에 이른다. 

“김영훈(金永勳)은 총회명령(總會命令)에 의(依)하여 중화민국 선교사로 임명(任命)하고”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안수를 받은 김영훈 목사는 중화민국 선교사로 선택을 받게 되었다. 총회는 선교사 선택과 파송을 서둘러 타문화권 선교에 대한 훈련과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파송을 받게 된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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