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중국 산동성 래양에서의 선교 과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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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지도자들의 태도

1913년 중화(中華)예수교장로회 화북대회(華北大會)가 개최되었을 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파견을 받은 박태로 선교사 그리고 김찬성 목사가 조선교회의 산동선교 문제를 제출하였다. 

당시 화북대회원 중에 영향력 있고 유명한 한 회원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반대를 분명히 하였다. 

“중화는 고대의 문명국이오 역사가 심장한 대국이며 세계 4분지 1의 인구를 가진 국가라 교만과 자존심이 많아 자칭 대국이라 하야 소국을 멸시하는 고래적 습행이 있으니 중화와 조선은 자고로 관계가 되어 대소와 조완의 차별을 두난 관계로 조선교회가 중화에 선교는 다방으로 고난이라.”

중국은 조선을 속국처럼 상대하였기 때문에 교섭 당시는 불가능이었으나 결국 화북대회는 일치 가결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산동 선교를 허락하게 된다.

당시 조선교회는 선교사를 보내기 전에 현지 교회와 협의를 통해 협조를 구하는 절차를 택하였으며 현지 교회를 존중하여 의논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오늘날 중국선교에 있어서도 삼자와 가정교회 모두를 존중하며 교류하되 바른 신학과 신앙을 가진 성경적인 교회를 더욱 중시해야 한다. 

1913년 10월, 김영훈, 박태로, 사병순 목사 일행이 산동성 연태를 거쳐 래양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은 이전에 평양 장대현교회를 출석한 적이 있었던 중국인 신자였다. 

조선 선교사 일행은 총회의 파송을 받은 후 정든 고향과 친척을 작별하고 기차로 안동현(安東縣)으로 가서 1일 체제하게 된다. 그리고 안동현에서 제14共同丸을 타고 대련(大連)을 경유하여 산동성 연태의 해변 지부에 도착할 때는 1913년 10월 상순이었다. 

조선 선교사 일행이 산동성 연태에 도착하여 서양 선교사 리 목사를 방문하였는데 리 목사는 산동성 노회에 참석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사세 불편하다는 이유로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목사 일행은 참석치 아니하였다. 

물론 막 중국에 도착하여 언어도 못하고 여러 면에 불편하여 불참한 것은 이해는 되지만 조선 선교사들의 도착 소식을 들은 중국교회 특히 산동 노회원들은 조선 선교사들을 보고자 했을 것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중화민국에 선교사를 보내어 교회를 세우면 그 나라 노회에 속하게 하고 따로 교회를 세우지 아니하겠다는 뜻을 중국교회 측에 밝힌 바도 있으므로 산동노회에 참석하는 것이 바른 순서였을 것이다. 

당시 중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서구 선교사들만이 대거 활동하던 시대에 아시아 출신의 선교사, 소국이라고 멸시하는 나라요 일제에 나라까지 빼앗긴 민족 조선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란 너무도 생소하고 그들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문화적 충격 

김영훈 선교사 일행은 1913년 10월에 임지인 산동성 래양현에 도착하였다. 고국을 떠나 선교임지인 래양현에 도착하기까지 배멀미, 교통의 불편함, 생소한 여관, 고국과 전혀 다른 풍경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 등 예상 밖의 상황들은 선교사 부인과 자녀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선교사 자녀들은 슬퍼하였고 사모들은 고국 생각이 간절하였다. 목사 선교사들은 사모나 자녀들보다는 문화적 충격을 덜 받았을 것이다. 

선교사 일행이 래양현에 도착하자 그들을 돕기로 되어 있던 그곳의 중국인 전도자는 나와서 일행을 한번 쳐다보고는 떠나버렸다. 중국인 전도자(A Chinese Evangelist)가 느닷없이 가버리자 선교사 일행은 가련한 모습으로 이국의 황혼녘에 남게 되었다. 그들을 존중해 주던 고국의 교회가 매우 그리웠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산동성 연태에서 동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중국어 교사가 그들을 도와주어 마련된 중국인 가옥에 여장을 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래양현 서문내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선교사 가족들 중에 가장 크게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한 사람은 역시 사모들이었다. 남편들은 언어공부와 외부인사 접촉 등 기분전환의 기회가 아내들보다는 많았다. 그러나 사모들은 음식을 장만하는 것부터가 큰 골칫거리였다. 자유롭게 시장을 볼 수 잇는 처지가 아니고 게다가 쌀은 구경도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중국인들처럼 식습관을 바꿀 수도 없고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곡물이라고는 밀가루, 소미(小米, 좁쌀)뿐이었다. 

 

선교임지 래양에서의 중국어 공부

김영훈 선교사 일행이 선교임지인 래양현으로 부임할 때 중국인 어학선생이 이미 동행하면서 돕기 시작하였다. 조선 선교사들의 언어공부를 위해 미리 적합한 중국어 선생을 소개받아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래양현에서 살면서 선교하려면 산동의 지방 말을 잘 익혀야 했으므로 산동 출신 중국인 어학 선생에게 배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표준 중국어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에도 산동의 여러 지방 사투리는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현지 방언을 익히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어학 선생의 월급은 본국 총회 전도국에서 세운 예산대로 지출되었고, 선교사는 어학 선생 월급 결정에 관여하지 아니하였다. 당시 어학 선생은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중국인이었을 것이다. 

조선 선교사 김영훈 목사 일행은 선교임지로 곧장 부임하여 현지에서 어학공부를 시작하는 방식을 취하였으나, 당시 산동성 연태에는 서구 선교사들을 위한 언어학교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서 신임 선교사들이 중국어를 배우는 데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비록 언어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으나 김영훈 선교사는 이미 한학에 익숙하기에 빠른 속도로 중국말을 배워나갈 수 있었다. 

1915년 가을 총회 전도국 보고서에 “中華民國 宣敎師의 어학 형편은 점점 진보하오며”라는 내용이 나타나 있으며, 1916년에는 “中華民國 선교사가 다 한어를 배워 강도(講道)와 전도하는 데 잘하오며”라고 보고되었다. 

1913~1916년 가을까지의 어학공부로 기본적인 중국말을 익혔을 것이고 설교를 잘한다고 보고는 되어 있지만 사실 깊이 있는 말씀을 다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말을 배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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