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하나님의 뜻인가, 행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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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불행한 일이 닥치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하고 하나님께 항의하게 된다. 어떤 전도사 부부는 남편이 어렵게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목사 고시도 통과했으며 이제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갑자기 암 선고를 받고 죽게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주님의 일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일어나는가? 모든 믿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면 공부를 하기 전에 하지 말라고 막아 주셔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고 원망한다. 그러나 나에게 상상하지 못한 행운이 닥치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지 않는다. 내게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할 줄 모른다. 

나는 미국에서도 복된 생활을 했지만 귀국한 후에도 왜 내게 이런 행운이 닥치는가? 왜 이렇게 유난히 따뜻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가? 하고 자문할 만한 일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지 못했다. 아니, 감사를 돌리기도 전에 일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일 년 반을 기전여고에서 근무한 뒤 나는 내가 다녔던 대전대학으로 옮겼다. 내가 대학교수가 된 것이다. 나는 이래도 되는가? 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학으로 옮겼다. 엄밀히 말해서 나는 그때 대학교수론 자격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석사 학위도 없는데 대학을 갓 나온 사람이 어떻게 대학교수가 된다는 말인가? 마치 세례도 받지 않고 기전여고에 교사가 된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이런 일들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뒤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대전대학에 교무과장으로 일하고 계셨던 분은 유 박사였다. 그는 미국의 같은 대학에서 공부했던 친구며 전주에 살던 문 박사를 찾아 잘 놀러 오곤 했는데 찾아와 놀고 가면서 대전대학에서는 세례교인만 교수로 초빙을 하는데 수학 교수를 찾을 수가 없어 걱정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문 박사는 나를 극찬하였다. 아마 그가 내 처조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전대학 출신인 나를 왜 교수로 쓰지 않느냐고 반문한 모양이었다. 이런 대화가 분명 동기가 되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대전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렇게 감사하지 않았던 일련의 일들이 뒤늦게 내 머리를 스쳐 갔다. 아내는 전주에서 세 어린애를 출산했는데 그때 내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김 박사가 세 어린애를 출산하기까지 끝까지 예수병원에 있어 주었고 우리가 떠나자 그도 광주 제중병원으로 떠나서 이제는 아내가 시골에 있는 동안 그를 찾아 상담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한 교장은 나를 대전대학에 편입시키더니 내가 졸업하기 일 년 전 미국으로 귀국했다. 더욱 이상하게 유 박사도 나를 대학에 취직시켜 놓고 2년 뒤에 서울로 떠났고, 문 박사도 캐나다의 매니토바 대학에 교수로 초청을 받고 떠나버렸었다. 내 주변에는 나를 위해 계셨던 분이 많았다. 

대전대학은 내가 2년 동안이나 학생으로 있던 곳이어서 낯선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수로 가게 된다는 것은, 위상이 달라서 두려웠다. 그때 대학의 서무과장으로 있던 사람은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동기생 Y였다. 그는 내가 신임 교수라고 내 정착금으로 미리 숙소를 구해놓고 나를 기다린다고 편지를 써 보냈다. 그런데 그도 내가 취직한 지 일 년 뒤에 대학을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더 귀한 선물을 내게 안기고 갔는데 나에게 새 집터를 제공한 것이다. 그는 대학 캠퍼스와 붙어 있는 외국인 학교 앞의 낮은 둔덕으로 되어 있는 임야를 사서 대지로 지목변경을 하고 정지 작업을 하였다. 그러면서 나더러 내가 원하는 어느 지점이든지 선택만 하면 그곳을 떼어 내 집을 짓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내 집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대지 대금은 언제 주어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대지로 정지 작업한 둔덕의 제일 높은 곳, 그리고 교회에 가장 가까운 곳에 집터를 잡게 되었는데 그곳에 지은 집이 내 평생에 처음으로 가져 본 낸 집이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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