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골리앗은 죽지 않았다

Google+ LinkedIn Katalk +

골리앗은 이스라엘을 조롱하며 도전했던 블레셋의 거인 장군이었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벌벌 떨고 있을 때 소년 다윗이 물매 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어 쓰러뜨린 이야기는 어린 소년부터 어른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때 죽은 골리앗은 지금도 살아나서 밤마다 나를 괴롭히고 떨게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 있다고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믿음은 세상을 맞서는데 그렇게 대담하지 못한 것 같다. 

대학교수로 채용해 달라고 원서를 내면서 수학과 과장을 만났다. 그의 첫마디는 “수학을 소설처럼 가르치면 안 됩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연세대 대학원을 나온 젊은 교수였다. 그런데 그때부터 나는 늘 내가 석사 학위도 갖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주눅 들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입학식 때와 졸업식 때였다. 입장과 퇴장 때 전 교수가 가운을 입고 입장하는데 나는 박사나 석사의 후드가 없어 졸업생과 똑같은 복장으로 식장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창피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졸업식, 입학식 때마다 계속되는 행사였다. 세상에서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센 골리앗과 예쁘장한 어린애 같은 다윗을 세워 놓고 “너는 누구를 지휘관으로 모시겠느냐?”고 묻는다면 지금 세상과 맞서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를 택할까? 안 보이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골리앗이 더 두렵다. 세상을 골리앗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내가 1963년 학생으로 입학했던 대전대학과 1969년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들어온 학교는 전혀 다른 학교였다. 당시는 입학 정원은 90명으로 실제 내가 졸업할 때의 졸업생 수는 26명에 불과했는데, 그에 비하면 지금은 거인이 되어 있었다. 수·물과가 수학과 물리로 분리되었고 성문과는 폐과되어(특수학과는 폐과하라는 교육부의 명령) 국문과가 생겼으며 인기 학과인 전자공학과가 생겨서 입학 정원이 130명이 되고 등록한 학생 수가 월등 많아졌었다. 입학 학생을 늘이기 위해 세례증명서 첨부는 완화되었고 따라서 불신 학생이 많아졌다. 성문과(聖文科)를 잃어버린 학과장인 모요한(John V. Moore) 목사는 자기가 가르쳐 내보낸 90여 명의 졸업생 사진을 자기 집 서재 앞에 걸어놓고 그들을 위해 계속 눈물로 기도하다 귀국했다는 말도 들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은 거의 소환되어 귀국했고 타요한 학장과 학위를 가진 몇몇 교육 선교사가 남아 있었다. 매일 있었던 채플(예배)는 월·수·금, 격일로 줄어들고 이제 이 작은 규모의 대학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있는 장로교 대학들이 통합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각 이사회는 고민하고 있다는 말도 들렸다. 당시 대전대학은 대학운영의 80%를 미국 선교부 자금으로 된 재단에서 부담하고 있어서 남장로교 고등교육국이 더 교육 지원을 하지 않으면 대학은 유지할 수 없는 때였다. 학장 타요한은 남장로교 본부는 5년 동안 지원할 금액을 일시에 지원하고 이제는 대학 지원을 그만둘 것이라는 말도 했다는 심각한 이야기들이 들리고 있었다. 전국 기독교 4개 대학이 앞으로의 진로를 위해 함께 협의했으나 특별한 대책은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숭실대학의 김형남 이사장은 대전대학의 이사를 겸하고 있어 늘 타요한 학장과 함께 대학 문제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1970년 연말에 숭실과 대전 두 대학 이사회가 통합을 결의했다. 두 대학이 통합해서 종합대학으로 새 출발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통합대학의 명칭을 숭실대의 전통을 생각해서 숭실대학으로 하자고 했으나 이 안은 대전대학의 반대가 심하여 『숭전(崇田)대학』으로 하고 법인 명칭은 『학교법인 연합기독교교육재단』으로 한 뒤, 교육부에 승인을 요청하여 이듬해 1월 교육부에서 『숭전대학』 설립 인가가 났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