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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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반장의 동원을 피할 수 없었고, 아버지께서 숨을 곳도 없으셨기 때문에 시골(말거리)에 사시는 고모님 집으로 가기로 하고 우리 가족은 빈 몸으로 사람들 눈을 피해 가며 식구들이 둘로 나누어서 집을 나섰다. 대룡산 근처 동네에 먼 친척이 살고 있어서 우리는 친척 집을 찾아가 밤을 지내고 다음 날 새벽에 길도 없는 산 대룡산을 걸어서 넘어 말거리 고모님 댁으로 갔다. 

고모부님께서 말거리 구장이시고 부자로 사셨다. 그 마을에는 공산당원들이 없었고, 마을 청년들이 가짜 공산당 내무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민군들이 나타나면 연락망을 통해 알려주어서 동네에 있는 청년들이나 젊은 여자들이 모두 산에 있는 굴속으로 피할 수도 있어 안전했다. 고모부님은 피난하고 있는 사람들을 숨겨주며 식사제공을 다 해 주셨다. 우리도 피난하는 동안 처음으로 끼니마다 흰쌀밥만 먹는 행복도 누려보았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되어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어서 우리 가족은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학생들이 다시 수업을 시작하자 갑자기 최명환 교련선생님께서 운동장에 전교생을 모이게 하시더니 군부대에서 학생이 필요하다고 하며 지원하는 학생은 손을 들라고 하자 서로 가겠다고 너도나도 다 들었고 그중 4명만 뽑아 선발대로 보냈다. 

다음 날! 이번에는 화천에 있는 부대에 1주간 취사를 돕는 학생이 필요하다고 최명환 선생님께서 먼저와 같은 방법으로 뽑았다. 나는 어머님의 허락을 미리 받았기 때문에, 지원을 하고 2차로 화천으로 떠났다. 

작정했던 일주일이 지났으나 북진하는 군부대 이동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고, 학생들은 군과 함께 각 부대로 배치를 받고 북진을 했다. 일주일만 있다가 돌아온다고 하고 떠났기 때문에 부모님께 알려드려야 하는데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나를 포함해서 5명(남자대학생 1명, 남자고등학생 1명, 여학생 3명)은 6사단 민사처로 배치가 되었다. 

우리 학생들은 국군을 도우면서 평양을 지나 평안북도 희천까지 갔다. 다행히 학생 대표 대학생이 학생들을 보호하고 지켜주어서 고마웠다. 위험한 전투지에서 많은 시체! 죽는 사람들! 숨어 있는 인민군들! 모든 공포 속에서 집이 그립고 부모님 생각이 얼마나 많이 나던지! 지원했던 것을 많이 후회도 했다. 

10월 말경에 기적적으로 만난 큰집 사촌오빠의 도움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대문을 두드리며 “엄마! 아빠! 나 왔어요” 하고 소리치자 동생들이 먼저 듣고 “큰언니다!” 하는 큰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죽은 줄만 알고 거의 한 달 동안 눈물로 보내시던 부모님! 언니 누나를 기다리던 동생들! 살아 돌아온 나를 서로 잡고 많이 울었다. 그때의 감격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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