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중국 산동성 래양에서의 선교 과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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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선교사의 이중 소속문제에 대한 최종 입장을 정리하여 1916년부터는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파송되면 소속도 중국 측 노회로 옮기게 되었다. 

김영훈 선교사 가정은 래양 서문내 중국인 가옥을 임대하여 거주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천대도 받고 생소한 생활환경 속에서 음식, 언어, 질병, 자녀교육의 어려움 등으로 고생해야 했다. 

김영훈 선교사는 1915년에 잠시 본국을 방문하여 장로회 총회에 선교사의 자녀교육 문제와 선교사 주택, 예배처소 및 질병치료 문제 등 당면한 어려운 점을 상정하였으나 별다른 답을 얻지 못하고 중국 현지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 선교사들은 언어를 배워가면서 전도를 시작하여 몇몇 교인을 얻게 되었으며 1915년에 이르러서는 교인 총수가 40여 명에 평균 30여 명이 회집하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1916년 4월에 본국 총회 전도국에서 파견한 선교지 시찰원 심익현, 이일영 목사가 산동 래양을 방문하여 선교 상황을 살펴보았으나 1916년에 박태로 선교사는 질병으로 선교지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다음해(1917년)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 역시 선교지 래양을 떠나고 말았다. 

총회 전도국을 대표하여 래양 선교지역을 시찰한 심익현, 이일영 목사는 선교사들의 고충을 잘 파악하고 상담하여 선교사의 주거와 선교시설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데 있어서 실패한 책임이 있으며 선교사 김영훈, 사병순 목사 역시 선교지에서의 어려운 문제들을 본국교회와 상의하면서 지혜롭게 극복하거나 적절한 후임자 선정 등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점에 있어서 아쉬운 점으로 남고 말았다. 

선교시찰단의 방문 목적은 선교사를 상담하여 문제를 잘 진단하고 발생 가능한 문제를 예방하려함에 있는 것인데 선교사들이 자퇴하는데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보아 책임을 다 하지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는 왜 자신들의 고충과 어려움을 총회전도국 담당자들과 의논하면서 허락 받는 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고 선교지를 떠나야 했을까? 

김영훈 선교사가 1927년 총회장 시절에 남긴 글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一九一三年秋에 第一回 山東宣敎師로 派送을 받고 四年間을 宣敎하다가 中途撤歸한 사람이다.(중략)

當初我의 撤歸한 本意를 不可能이라 함도 아니요 不可라 함도 아니라 但 傳道局으로 하여금 宣敎事業에 對하여 施設을 相當케 하기 爲함이다.

到今하야는 宣敎師에게 向하야 施設과 凡節이 四洋 富國과 같이 裕足다 할 수는 無하나 貧弱한 우리로는 誠과 力을 盡하였다 하여도 過言이 아닌 듯하다. 

그러면 我는 撤歸함으로 目的을 達하고 宣敎의 門路를 開拓한 줄 自信하고 榮光과 讚頌을 神에게 歸한다”

김영훈 선교사가 산동 선교지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드러난다. 그것은 선교사에게 향한 시설과 범절이 유족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선교시설과 선교사에 대한 예우에 있어서 빈약하였다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가 자신들의 상황에 필요한 요구가 적절하게 수용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총회 전도국과의 충분한 대화와 협의를 거치지 아니하고 선교지를 떠난 점은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가 래양을 떠나 미국으로 가게 되는 과정에 김영훈 목사가 잘 아는 미국 선교사는 누구였을까? 

아마도 그가 처음으로 1913년 산동 연태 지부에 도착했을 때부터 안면이 있고, 산동장로회 소속으로 다년 간 조선 선교사 문제(이명문제 포함)에 관여한 리 목사 혹은 연태에 거주하는 미국 선교사가 아니겠는가라고 추측해 볼 뿐이다. 서양선교사 리 목사는 이유렴 목사일 가능성이 높다. 서양선교사 이유렴에 대한 언급이 총회록에 나타난다. 

조선에서 오랜 기간 선교사로 활동한 곽안련 박사는 자퇴 이유의 하나로 선교사 자신들의 견해(중국인 전도자 20명 고용자금 제공 청구했다고 하나 그 사건은 첫 3인과는 무관하다)가 기각당한 것 때문이라고 주장하나 곽안련 역시 산동선교 역사 진행과정을 혼동하므로 그런 틀린 주장을 하였다. 

그리하여 김영훈 목사는 1913년 11월부터 1917년 4월까지 만 3년 6개월 동안 산동선교사 활동을 마치게 되었다.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는 떠나게 되면서 1917년에 파송을 받은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 가족이 래양 교우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1917년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가 래양을 떠나고 신임 선교사 방효원, 홍승한 목사가 부임하던 당시 래양교회는 많이 회집하면 50~60명, 적게 회집하면 40~50명이었고 세례교인 28명, 학습인 35명이었다.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선교사가 철수하고 1917년 후반기부터 방효원, 홍승한 선교사가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전도국의 산동선교의 가장 큰 변화는 조선선교사들의 선교기지를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다. 800여 평의 넓은 대지가 마련되었고 기지 안에 선교사의 주택과 복음당(福音堂)까지 마련된 것이다. 

래양 서문내에서 시작된 래양교회는 1918년 1월에 래양 남문밖으로 옮긴 후 래양성교회라는 이름으로 보고되어졌고 1919년부터 남관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18-1919년에 래양 남관교회는 방효원, 홍승한, 박상순 목사가 연합하여 사역한 교회로 1920년에 새 예배당을 신축, 낙성하였다. 

래양 남관교회 새 예배당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매득한 기지 위에 건축되었으며 돌과 벽돌을 사용하여 장이 50척, 광은 20척, 고가 10척 되는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가 해외에 최초로 건축한 예배당이며 위치는 래양성 남정문의 사통오달한 곳으로 총 건축비 750원을 들여 건축하였다. 

개척 선교사 박태로 목사의 희생과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의 고통스러운 초기 사역과 사퇴의 결과는 래양선교의 새 기반을 조성하는 초석이 된 것이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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