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지성] 북한 핵무기와 미사일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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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종전기(終戰期)에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함에 따라 이에 대응하여 한달 후 9월 8일에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면서 미‧소 충돌 완충선으로 38도선이 생성되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코민테른의 전략의 일환으로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공산당 중심의 단독정부 수립을 명하였다. 그에 따라 1946년 2월 북한에 실질적 정부인 북조선 임시위원회가 들어섰다. 광복 후 3년 동안 남‧북한에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해 있는 동안 남한과 북한이 유엔에서 합법 정부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 첨예하게 진행되었다. 유엔총회 결의 제112호는 1947년 11월 유엔총회 남북한 선거 실시 결의안의 통과로 유엔 한국 위원단은 1948년 1월에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북한에서의 활동이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는 한반도 가능한 지역 내에서만이라도 선거에 의한 독립정부 수립할 것을 가결하였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 의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에서는 그해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8년 12월 12일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에서 ‘48대 6(기권 1, 불참 3)’으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승인 가결되었다. 반면 이에 대항해 소련이 상정한 5‧10총선거 결과 폐기와 유엔 한국위원단의 해체 동의안은 ‘46대 6(기권 3)’으로 부결되었다. 그후 남북한은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다.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도발을 회고해 보면, 북한은 한반도 적화통일을 위한 도발정책을 사실상 멈추지 않았다. 예컨대, 1950년 6‧25전쟁을 비롯하여 1968년 1‧21청와대 기습사건,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에 걸친 북한 무장군인들의 울진‧삼척지역 침투사건, 1987년 858 KAL 폭파사건,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피격사건,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사건 등을 자행하였다. 

한편 북한은 그간 6차례의 핵실험과 수없이 많은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였다. 2022년 1월 한 달 동안만 하더라도 7차례나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였다.

이처럼 잦은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등의 실험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이 국제적으로 핵보유국을 인정받아 북한 체제를 공고히 할 뿐만 아니라, 군사강국으로써, 군사적으로 남한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미‧러 분쟁과 남한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해득실을 안중에 두고 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1978년 중국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中全會)’ 이후 사상해방과 실사구시 기치 하에 세계적인 경제대국이 된 것을 직시하고, 베트남, 쿠바 등이 얼마나 변화하고 있는가를 북한은 똑바로 바라보라. 국가 권력은 개인의 사유물이 결코 아니다. 백두혈통의 주장이 허구인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숨길 수가 없을 것이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 모든 것을 순리적으로 평화적으로 해야 난제가 풀릴 것이다. 북한의 인민과 세계인의 진의(眞意)를 무시하고 미사일을 쏘고 또 쏘아 보아라. 그 종착역은 과연 어디일까? 공멸을 향해 자행자지하는 독재자를 세계인들은 좌시하지 않으리라. 역사의 심판에 이르기 전에 헛방을 계속 쏘아대는 어리석음을 멈춰야 할 것이다.

조인형 장로 

– 영세교회 원로

– 강원대 명예교수

– 4.18 민주의거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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