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강단]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행 11:26,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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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 말은 아메리칸, 러시안이라는 방식의 표현과 유사합니다. 아메리카에 속한 사람이 아메리칸, 러시아에 속한 사람이 러시안인 것과 같습니다. 누가 이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스스로를 지칭한 말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신자들은 스스로를 따로 정의해서 부를 일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 성도, 형제, 자매’ 이런 식의 표현으로도 충분했을 겁니다. 하지만 외부인들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했을 것이고 나름의 방식으로 판단을 내려 부르기 시작했다고 추측됩니다. 

초대교회 시절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수치스럽고 간교한 것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라 말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도행전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 본문에 사용된 ‘비로소’라는 표현을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이미 그들에게는 굉장히 명예로운 이름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했건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표현이 자격을 상징하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장 5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나사렛 이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의 별명이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입니다. ‘나사렛당’이라는 표현은 지금도 아랍권에서 그리스도인을 부를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좋은 의미는 아닙니다. 주후 49년 클라우디우스 지배하에서 추방령이 내려졌을 때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은 모두 로마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증언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들은 고린도로 이주해있다가 나중에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데 그것이 이 추방령으로 인한 이주인 셈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로마를 떠났다가 네로의 통치 초기(주후 54년)에 로마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후에 로마의 대화재가 발생하여 최소 3일간의 맹렬한 불길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습니다. 추방에서 돌아온 뒤에도 쉽지 않은 생활이었을게 뻔했지만, 네로 황제가 직접 범인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지목하여 버리면서 박해가 본격화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화재로 인해 로마 시민들의 증오가 그리스도인에게 충분하다 싶을 때부터 온갖 잔인한 형벌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주머니에 넣고 바느질로 꿰매는 형벌, 십자가형, 화형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이 형벌의 특징은 고통을 맛보며 서서히 죽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이런 형벌은 고스란히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졌습니다. 로마시민권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 살벌한 시기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고, 네로의 잔인한 형벌은 오히려 백성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게 만들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역사가 타키투스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정의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해석은 당대의 황제를 의식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해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요? 또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일까요? 한마디로 말씀드려 별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초대교회 시절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숫자는 지금이 월등하게 많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힘도 막강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대한 고민이 깊지 않고 불신자들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별로 부담을 가지지 않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 대한 반응은 극명한 것이 맞습니다. 굉장히 긍정적으로 불러주거나 아니면 부정적으로 불러주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 정상입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우리가 읽은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을 보면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와서 1년간 사람들을 가르쳤고 그 결과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미쳤기에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호칭이 역사가 타키투스에게는 혐오의 이름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영향력으로 판단이 되었기에 같은 이름을 이렇게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이름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영향력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나사렛이단의 괴수라고 불리워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향력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고, 그것이 안디옥 사람들이 불러준 것처럼 존중의 의미인 것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의 그리스도인 다움으로 영향력있는 사람들로 불리워진다면 우리의 소임은 이미 충분히 다하는 것이 됩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매우 어려운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선한 영향력이 필요합니다. 모르는 길을 알려줄 사람이 필요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며,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손길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으로 비춰지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모든 것은 끝내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가 혐오하던 그리스도인이 로마인의 기준이 되었으니까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워지시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이름이 부정적으로 비취더라도 흔들림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영향력을 선하고 복되게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김진성 목사

<통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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