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317) 아브라함 링컨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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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 비극 극복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굴곡과 투쟁 거쳐 인권신장 이룬 ‘거인의 어깨’

링컨은 농담을 잘하는 쾌활한 사람이었다. 링컨이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여성은 그가 1835년 뉴 살렘에서 만난 앤 루트리지였다. 그러나 약혼하지 못했고 앤은 장티부스로 죽었다. 링컨은 1840년 메리 토드와 약혼 했는데 그녀의 집안은 켄터키 주 렉싱턴에서 노예를 소유한 부잣집이었다. 

그들은 1839년 12월에 스프링필드에서 만났고 12월 말 약혼했다. 1841년 1월 1일에 결혼하려 했지만 결혼을 취소했다. 

그 후 파티에서 다시 만났고, 결국 두 사람은 1842년 11월 4일에 메리의 시집간 언니가 사는 스프링필드 저택에서 결혼하였다. 1844년 링컨 부부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가까운 스프링필드에서 살았다. 

메리 토드 링컨은 집에서 부지런히 일했고 남편이 변호사로 번 한정된 돈을 효율적으로 썼다. 로버트 토드 링컨이 1843년 태어났고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이 1846년에 태어나면서 링컨은 가족 수가 늘었다. 가정부에 의하면 링컨은 “특별히 자녀들을 좋아했다”고 했다.

그러나 셋 중에 에드워드는 폐결핵으로 죽었고 그 후 1851년 12월 21일 윌리엄 윌리스 링컨이 태어났다. 그러나 1862년 워싱턴에서 열병으로 죽었다. 

링컨의 네 번째 아들인 토마스 링컨은 1853년 4월 4일에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살았지만 18살에 시카고에서 죽었다. 로버트는 18살을 넘겼다. 

링컨의 아내 토드는 명문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예의범절이 몸에 밴 사람인데 소작인의 아들인 링컨은 자유분방하게 자랐기 때문에 벽에 발을 올려놓고 책을 읽는 등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들은 갈등이 심했다. 

자녀들의 죽음이 삶의 행복을 빼앗았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해야만 했다. 반대파의 항의도 강했다. 이를 극복한 대통령으로서 오늘도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대통령이 되었다.

1862년 9월 22일 노예해방선언으로 해방된 노예가 3백만이었다. 링컨의 노예해방을 두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이라고도 평가한다. 

또 그가 노예해방 자체보다는 중앙집권적 연방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함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를 인정하더라도 링컨 이후 미국 역사가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의 역사로서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노예해방 이후 굴곡과 투쟁 과정을 거치며 인권 신장의 역사를 이루어올 수 있었던 것은 링컨이라는 <거인의 어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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