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서울장신대학교 제7대 총장 황해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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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학교에서 정통신학과 다양한 전문 분야도 교육해야”

천 개의 교회보다 신학대학교 하나가 더 중요한 때

지난 1월 새해를 맞아 처음 드리는 주일예배에서 황해국 목사는 세광교회 전 교인들에게 서울장신대학교 총장에 선임됐다는 사실을 알렸다. 개척해서 29년을 섬긴 교회였다. 교인들은 생각지도 못한 황 목사의 말에 처음엔 반응하지 못하다가 나중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한 교인은 “목사님이 내 장례예배도 집례하실 줄 알았다”며 그를 붙들었다. 많이 기도하고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으나 황 목사 역시 “제 삶이고 제 가족인 교회였는데 너무 마음이 아프다”라고 말했다.
서울장신대학교 제7대 총장 취임식을 앞두고 황해국 목사를 만났다. 몇 주간 기도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황 목사가 잠시 짬을 낸 틈을 타 진행된 인터뷰였다. 황 목사는 서울장신대학교에서 일하게 된 것에 대해 모교를 향한 각별한 애정과 어려움에 처한 신학대학교를 돕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맨바닥에서 개척해서 29년을 섬긴 교회예요. 교회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니고 은퇴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교회에서 남은 목회를 잘 마치고 편안하게 은퇴를 맞이할 것인가, 새롭게 총장직을 맡아 위기상황 가운데 있는 학교를 다시 세워볼 것인가, 고민도 정말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했어요. 인간적으로는 전자가 훨씬 좋지요. 그런데도 결국 후자를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 제게 학교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커요.”
황 목사는 조실부모했다. 중학교 2학년 나이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에도 바로 진학할 수가 없었다. 일을 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교육전도사로 부임했다. 그리고 들어간 학교가 서울장신대학교였다.
“아버지는 이북 분이셨는데 열심히 사셨지만 제 생각엔 북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셔서 돌아가신 거 같아요. 그날이 설날 전날이었어요.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애를 쓰시면서 사셨는데 자기 몸을 돌보지 않으셔서 같은 해 추석 닷새 전에 돌아가셨어요. 순식간 에 가정이 무너졌죠. 6형제인데, 당시 제일 위에 형님 두 분은 결혼하셨고 둘은 직장 생활을 하고 계셨고 저와 동생이 김포에 계시는 작은아버지댁으로 보내졌어요. 작은아버지는 교사셨는데 교사 박봉에 작은아버지 식구들에 저희까지 더해지니 형편은 좋지 않았지요. 공부가 너무 하고 싶은데 고등학교엘 갈 수가 없었어요. 약방 점원, 과외선생, 신문배달, 판매 등등 일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해서 고등학교에 갔고, 동생도 중학교, 고등학교 공부를 시켰어요. 제 마음 속에는 일찍부터 열정이 있었어요, 주님을 향한 열정. 그런데 군 제대도 하기 전에 친구가 저더러 자기 교회 전도사로 오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신학도 안 했다고 거절했죠. 제대 후 그 친구를 만나러 친구네 교회엘 갔는데 이미 친구가 교회 장로님께 제 얘기를 해놓아서 저를 보신 장로님께서도 저더러 전도사로 부임하라고 하셔서 저는 신학도 아직 안 해서 전도사로 일할 수 없다고 사양을 했지요. 그런데도 여러 번 말씀을 하셔서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를 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을 얻게 됐어요. 그래서 신학교 학부도 들어가기 전에 교육전도사 일을 먼저 했어요. 그리고 들어간 학교가 서울장신이었던 거예요. 서울장신에서 4년간 계속 장학금을 받으며 전교 수석을 했어요. 당시 제가 생활이 어려우니 장학금이 아니면 학교엘 다닐 수도 없었지만 너무나 하고 싶은 공부였고 제 신앙과 학문이 융합이 돼 공부가 무척 재미있었어요. 그러니 자연히 성적도 잘 나왔던 거지요. 공부를 하면서 제 소명을 다시 확인하고 갈급했던 학문적 욕구도 채워지고, 서울장신대에서 제 인생의 기틀이 마련됐기 때문에 서울장신에 애정이 더욱 큰 거죠.”
이후 황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와 미국 맥코믹신학교에서 공동 목회학 박사(D.min),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박사(Ph.D) 학위를 취득했다.

양친 잃고 고학했지만 예수로 행복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일을 하며 어렵게 공부했지만 “그때는 고생인 줄 몰랐다. 너무 행복했다”고 황 목사는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황 목사 얼굴이 정말 그러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황 목사에겐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고생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고 너무 행복했어요. 그때 제 눈에는 세상이 너무 맑고 아름다웠어요. 예수를 믿으니 주님이 늘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고 감사했고 그저 좋았어요. 정말 그랬어요. 교회가 너무 좋았어요. 부모님을 잃은 내게 교회는 어머니 품이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김포 시골 숙부 댁에 보내졌는데 거기에서도 근처에 있는 교회엘 찾아나갔고, 등하굣길에 교회에 들러 기도하고 가을엔 꽃을 꽂아 놓기도 했어요. 중학교 때 교회학교 부장님이셨던 집사님 한 분이 제게 그러셨어요. ‘해국아, 호랑이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풀을 먹지 않는단다. 너는 범 새끼니 네 몸을 함부로 하지 말아라.’ 그 말씀이 제 마음에 남아 저는 평생 술 담배를 하지 않았어요. 어려서부터 제게는 ‘나는 선택된 사람이다’라는 의식이 있었어요.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에 제가 서원을 했었어요. ‘주님 신학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저는 평생 교회와 학교, 집, 이 세 군데 외에는 제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했었고 정말로 그 외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어요. 어려서부터 교회 일을 정말 열심히 했지요. 교회 어른들이 제 자취방에 김치며 반찬, 라면 같은 것들을 갖다 놔주셨어요. 교회는 정말 제 어머니였어요. 가진 것 하나도 없었는데, 사글셋방에 살면서도 주님이 너무 좋았고, 버스를 세 번 갈아타서 교회에 가기도 했어요. 결국 교회 근처로 이사를 해 형님이 버스를 세 번 갈아타시면서 출퇴근을 하셨죠. 고등학교 때는 교회가 너무 좋아 사찰을 했는데, 당시 고등학교 등록금이 1만원이었는데 교회 사례비가 4천원이었어요. 교회에서 잠자고 교회에서 눈떠 새벽기도 하고 학교엘 가곤 했어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마치 사무엘이 성전 안에 있는 것처럼 행복했어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교회가 상처받는 걸 참을 수 없어요. 교회는 무조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 제 목회 신념이 됐습니다.”
황해국 목사는 승동교회 유치부 출신이다. 식구들 중에 제일 먼저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고 그 뒤를 이어 부모님과 형제들이 예수를 믿었다.

신학대학도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저출산 현상으로 우리나라 학령인구는 해가 갈수록 감소 추세다. 전국 대학교가 위기인 만큼 신학대학교가 안고 있는 어려움도 매우 크다.
“올해 우리나라 전국 대학 입학 정원에서 1만5천 명이 미달됐다고 합니다. 향후 2년 안에는 12만 명이 부족할 것이라고 예견되고 있어요. 그러면 전국 87개 대학이 큰 어려움에 빠져요. 신학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죠.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어요. 그래서 더 많이 고민했고요.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지금은 천 개의 교회보다 신학대학교 하나가 더 중요한 때라고. 그 말씀이 제게 남아 있었고, 저는 이 난관을 어떻게 하면 잘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총장직을 맡았어요.”
황해국 목사가 개척해 담임해 온 일산 세광교회는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얼마 안 된 2020년 봄, 교회 안에 방송국을 개설했다. 주일예배는 물론 모든 예배와 소모임, 교육을 모두 영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콘텐츠를 제공해왔고 그렇게 제작되어 유튜브에 올라간 콘텐츠가 1600여 개다. 조회 수도 꽤 높다. 가정예배를 위해 제공된 유튜브 영상 하나 는 1천 번 이상 조회됐고, 모든 영상들이 평균 350~500회 정도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다.
“‘미스바 비전 방송국’를 만들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성도들이 가정 예배를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드릴 수 있도록 가정예배 영상을 제공하고 있어요. 예배뿐 아니라 교인들을 발굴해 간증을 전하는 ‘세(世)롭 게 하소서’, ‘홍순화 목사와 함께 하는 성서지리연구’, 숨겨진 한국교회 사 이야기를 담은 ‘신앙의 디딤돌’, 상담을 전공한 제가 직접 방송하는 ‘가정과 신앙의 Q&A’, ‘교계이슈 짚어보기’, ‘제직수련회’와 ‘특별예배’들도 다 영상으로 제작해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드리고자 했지요. 그 결과 우리 교회는 본당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이지 않아도 교회가 잘 유지됐어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코로나가 터진 이 시점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면서 만든 거예요. 예배는 바뀌지 않고 지켜야 하지만 전달방식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지요. 그래서 교회가 트랜스폼(transform)한 겁니다. 복음은 바뀌는 게 아니에요. 복음은 바뀌지 않지만 복음을 둘러싼 환경, 콘텍스트(context)는 바뀌는 거지요. 신학대학도 그렇게 변모해야 한다는 겁니다. 신학과에서 칼 바르트를 가르치는 건 기본이지만 영상, 음향, 상담 등 이런 걸 같이 가르쳐야 해요. 신학생들이 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들을 신학교에서 함께 가르쳐 전문가가 되도록 하는 거예요. 신학대학도 기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황 목사는 신학대학에서 정통신학과 함께 양질의 직업교육을 제공해야 학교를 졸업한 수많은 신학생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목회 사역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 강조했다. 황 목사는 총회 ‘자립대상교회와 개척교회 목회자 자비량 목회 및 선교를 위한 직업교육 연구위원회’ 위원장 을 맡아 그 연구 결과를 103회 총회에 보고한 바 있다. 103회 총회에서는 황 목사가 헌의한 ‘텐트 메이킹’의 필요를 인정하며 목회자의 직업 교육을 각 신학대학교에서 실시할 것을 결의한 적이 있다.
“큰 숲에 소나무만 잔뜩 있으면 건강한 숲이 아니잖습니까. 여러 다양한 식종이 있어야 건강한 생태계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소나무와 같이 큰 나무만 키우는 신학을 해왔어요. 무조건 커라, 성장해라, 이것이 이른바 성장신학이지요. 이 같은 성장신학이 지난 60년 한국교회를 이끌어왔다면 이제는 다양한 형태의 목회 패러다임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최근 ‘선교형 교회’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정의되고 있어요. 영상 목회자, 건축 목회자, 생태 신학 목회자, 공동체 목회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 목회자가 나와야 해요. 총회 결의에 따라 그것을 신학대학교에서 교육해보자는 거예요. 그러면 신학대학교도 특화될 수 있고 신학생들도 다채로운 목회 꿈을 펼칠 수 있지요. 저는 우리 학교를 특화시키고 싶어요. 그와 같은 전문 목회자를 신학대학교에서 배출하면 지금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103회 총회에서 헌의했던 것이고 그것을 이제 학교에서 실현해보고 싶어요.”
/한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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