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평신도 운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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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숭전대학신문』의 주간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중에도 여러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좇고 있었다. 1970년 충남대학교 석사과정을 하고 있으면서 1971년 10월에는 현대문학이나 월간문학, 한국문학 등에 발표한 단편들을 모아 『아시아 제』라는 단편집을 출판하였다. 간호전문학교에 있던 송 교수의 도움으로 H문화사를 통해 출판한 것인데, 그 출판사는 유통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인쇄한 모든 책을 내가 다 인수하기로 하고 출판하였다. 대전의 문인들을 초청하여 출판기념회도 성대히 했지만, 남은 것은, 내가 물려받은 책뿐이었다. 아무리 친지에게 진상해도 책은 집에 또 남았다. 결국, 이 책들은 이사 다니면서 폐지로 버릴 수밖에 없었다. 비참한 패배감에 사로잡혔었다. 그러나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대전의 문인들은 나를 격려하며 지방 문인회에도 참가하여 작품활동을 해 달라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문인회에 참가하면 작품 발표를 해야 하는데 나는 그때 워낙 과작이어서 중앙 문단에 낼 작품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는 때였다. 

그러는 중에 나는 또 교회의 평신도회에 심취했다. 당시 한국에는 평신도 운동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던 때였다. 나는 1971년 8월 대구 계명대학에서 있었던 당시의 제14대 평신도 전국 연합회 회장이었던 노정현 박사의 특강에 압도당했다. 특강 후 분과 토의 때는 우리 대학에서 같이 갔던 신 교수가 ‘교회혁신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분과 토의를 진행했고 내가 기록을 맡았었다. 노 교수는 1959년에서 1962년까지 미국 뉴욕에 유학해서 뉴욕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 연세대에서 교무처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해의 평신도대회의 주제는 ‘사회로 향한 평신도’였고 여기서 그는 “평신도는 이제 교회에서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나온 메시지를 품고 사회에 나가서 전하는 그리스도의 참다운 메신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평신도는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서번트(종)가 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나는 뒤늦게라도 이 평신도회의 필요성을 깨닫고 1971년 초 내가 다니던 대전제일교회의 전도부를 평신도회로 개명하고 대전대학의 교수였던 친구, 김 집사를 평신도회장에 추대해서 처음으로 우리 교회가 대전에서 평신도회 조직을 마친 교회가 되었다. 이어서 대전지구 연합회를 조직하여 오정교회의 남 장로를 초대 연합회 회장으로 추대했다. 회장은 장로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부회장, 당시 대전신학교 학생이었던 박영○을 총무, 기독공보사 기자 겸 지사장이었던 고재○ 집사를 회계로 선임하여 대전노회 평신도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평시도회를 가진 교회가 몇 되지 않아 거창한 창립총회를 가질 필요도 없이 대전노회 연합회가 먼저 결성되고 그 뒤는 교회마다 다니며 평신도회를 조직하라고 홍보하고 다녔다. 수요일 밤 예배에 간증 설교를 하게 해 달라고 사정하고 허락된 교회는 임원들이 참여하여 평신도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평신도회 조직을 독려하였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지상명령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며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믿고 주의 지체가 된 나는 교회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어떤 부름을 받았는가? 죄의 굴레를 벗고 자유롭게 된 우리, 모두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다. 예배당에 모이면 목사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기쁨이 넘치는 모이는 교회가 되며 가정과 직장, 세속적 세계에 나가면 몸소 예수님의 삶의 본을 보이는 흩어진 교회가 되어 살아야 한다. 교회라는 구원의 방주에 앉아 세상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영혼을 보고 빨리 이 방주 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이, 구원받은 평신도의 모습이 아니다. 또 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이 원하시는 바도 아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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