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중국선교 100년과  김영훈  목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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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크라멘토 지방 한인교회 목사이면서 중앙총회 중화인 교섭위원 김영훈 목사는 1919년 6월 15일 새크라멘토 지방 중화회당(中華會堂)에서 큰 환영을 받기에 이른다.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중화인 교섭위원 김영훈 목사는 우리 민족의 대활동과 중국 및 동양의 관계를 들어 장건(壯健)하고도 간명(簡明)하게 중국문장(中國文章)으로 작성하여 샌프란시스코 지방 중국신문 “중서일보” 4월 30일자 신문 제1면에 발표하였거니와 1919년 6월 15일에 김영훈 목사와 국민회 위원들은 새크라멘토 지방 중화회당에서 열린 대회에서 큰 환영을 받기에 이른다.

당시 재류 중국인 인사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중화회당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먼저 대회 개최에 대한 취지 설명과 중국 청년의 한중(韓中)관계 연설이 있었고 중국인 학생단 음악대의 주악에 이어 김영훈 목사의 연설이 이어졌다.

김영훈 목사는 당지 재류 중국인들에게 일장 연설하였으며 연설 후에는 중국인 각 단체 직원들의 요청으로 중화루(中華樓)에서 만찬하며 간담을 나누었고 중국인들이 뜨거운 동정으로 국민회의 활동을 원조하기로 약속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19년 7월부터 김영훈 목사는 남감리교회 새크라멘토 한인교회 관리목사 일을 보았고 국민회 중앙총회 활동 그리고 새크라멘토 국어학교 교장 일을 맡아 보았다.

김영훈 목사는 1919년 10월에 열린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에서 부회장 후보로 1표를 얻기도 하였다. 

당시 북미지방 산하에는 17개 지방회가 있었다. 김영훈 목사는 1919년 11월 신한민보에 “동포 제군에게 감사”라는 제목으로 근황을 보고하였다. “여러분의 성심으로 연조하여 주심으로 새크라멘토에 국어교육이 잘 되오며 새로 옮기는 교당도 외인의 처소를 면하게 되오니 감사하외다”

삭도국어학교는 매년 11월 1일에 개학하여 다음해 4월 말까지 수업을 진행하였다.

김영훈 목사의 보고에 의하면 1920년 가을부터 김제신 여선생이 교수하게 되었으며 당시에 유치반에는 14명, 고등반에는 학생 3명이 등록되어 있었다.

1920년 3월, 새크라멘토 지방 한인 400여 명은 대한독립(大韓獨立)선언 제2주년을 맞이하여 경축예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 지휘 아래 중앙총회장 윤병구 씨의 개식사와 김영훈 목사의 간곡한 기도에 이어 독립선언서 낭독, 임시 정부 헌법 낭독 등 다채로운 순서로 진행하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1920년 10월 11일에 샌프란시스코 한인 예배당에서 열린 한인교회 지방회에도 참석하였다.

한인교회 지방회는 액돈 목사와 상항교회 리대위 목사, 황사선 전도사, 임정구 목사, 오클랜드교회 조성학, 삭도교회 김영훈, 멘티카교회 강천명 씨 등이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두부스 감독 사회로 개회하여 경과보고와 새로운 사건 보고로 진행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한인교회 지방회 참석 후 1920년(大韓民國二年) 12월 12일 오후 8시에 거행된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北美總會) 총부회장 취임식에도 참석하여 기도 순서를 담당하였다.

해가 바뀌어 1921년 3월에 거행된 새크라멘토 지방 ‘3.1절 경축회’에서도 김영훈 목사는 기도와 헌법 낭독, 그리고 추도회에서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새크라멘토 한인 사회에서 중요한 인물로 활동하면서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에서도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어 1921년 10월에는 총회장 후보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1921년 10월 10일에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 대의원회 의원 황사선 씨는 각 지방의 대의원이 보고한 1922년도 총부회장 후보자의 이름과 표수를 조사 공포하였다.

총회장 후보자 6명 가운데 강영승 씨는 2표, 김영훈 2표, 리대위 2표, 황사선 2표, 김려식 1표, 최진하 1표를 얻었으며 총회장 후보 당선자 가운데 황사선, 리대위 씨가 사면 청원하여 대한민국 4년도 총부회장 후보자는 총회자 후보자 강영승, 김영훈, 부회장 후보자 김현구, 한재명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 총회장 후보자로 김영훈 목사 이름이 공표되기 전인 1921년 9월 평양 장대현 예배당에서 개최된 제10회 장로교 총회 시(時)에 헌의부장 김익두 목사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지금 미국에 가서 류하는 김영훈(金永勳) 씨가 중국 산동으로 다시 보내주시기를 바란다 하는 청원은 전도부로 보낼 일”

김영훈 목사는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본국 장로회 총회에 편지를 보내어 중국 산동(山東)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청원하기에 이른다.

김영훈 목사는 1913년에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곧 중국 산둥(山東) 선교사로 선택되어 1917년 봄까지 중국선교사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선교지의 어려움과 총회 전도국에 대한 불만을 극복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1917년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김영훈 목사는 중국 선교사 경력의 목사 신분을 가진 종교인이면서 동시에 민족독립운동 지사이자 정치가로 두 얼굴을 갖고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중국 상해(上海)에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인사 가운데 여러 인물들 역시 종교가이자 독립운동 지사로 활동한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임시정부와 중국 상해(上海)한인교회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던 여운형(呂運亨) 역시 민족독립운동 지사이자 정치가이며 종교가라는 두 얼굴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일제(日帝)는 중국와 미주 등지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독립운동 움직임을 철저하게 분석조사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민족주의와 종교에 대한 회유정책을 실시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친일파를 양성하기 위한 정책을 수집하였고 그 가운데 친일파 육성과 국외 독립운동 세력의 내부 와해를 촉진하는 공작을 병행하였다.

여운형은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 이후 한중 연대를 이끌어낸 중심인물로 일제의 포섭공작 대상이 되었고 일본 정부 초청으로 1919년 11월에 일본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일제의 여운형 회유공작은 실패에 이르지만 국내외 한인(韓人)의 독립사상을 뿌리 뽑기 위한 저들의 공작은 계속되었다.

1917년 여름부터 1921년 가을에 이르는 동안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 지방에서 민족독립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하던 김영훈 목사는 1921년 9월에 개최되는 본국 장로회 총회에 편지를 보내어 중국 산동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청원하기에 이른다.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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