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긴과 보아스] 즐기는 자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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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폐막한 동계올림픽에서 매우 속상한 일이 있었다. 쇼트트랙 1000미터 경기 때문이었다. 운동선수들의 꿈이 있다면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이다. 국가대표가 되어서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면 모든 초점을 올림픽에 맞춰 4년의 세월을 준비하게 된다. 인생을 건 4년의 세월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력한 만큼 정당한 결과가 주어져야 하는데,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으로 한국 선수들이 모두 탈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선수들의 노력을 도둑질해가는 일이며, 스포츠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온 국민이 분개했다. 인터넷 댓글창에 여러 가지 글들이 올라왔다. “선수단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과격한 말도 있었고, “눈뜨고 코 베이징” 또는 “중국체전이다” “땅이 커서 소국이라 할 수 없고, 하는 것을 보니 대국이라 할 수 없고, 그래서 중국이다”등 위트있는 글도 있었다. 

그런데 피해 당사자인 황대현 선수는 얼마나 억울했을까? 아마 억울해서 잠을 못자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의 인스타그램에 의외의 글이 올라왔다. 그는 마이클 조던의 글을 인용해서 이런 글을 썼다. “장애물을 만났다고 반드시 멈춰야 하는 것이 아니다. 벽에 부딪친다면 돌아서서 포기하지 말라. 어떻게 하면 벽에 오를지, 벽을 뚫고 나갈 수 있을지, 또는 돌아갈 방법은 없는지 생각하라”는 글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1,500미터 경기에서, 위기를 극복하고, 보기 좋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통쾌한 순간이었다. 과거에는 올림픽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세상에서 가장 원통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유쾌하고 통쾌하게 장애물을 극복하고 금메달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요즘 청년들은 우리 세대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된다. 요즘 청년들은 유연성이 있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올림픽이 얼마나 엄중한 무대인가? 그런데 이러한 무대에서도 유연하고 성숙하게 대처해 나간다. 판정이 잘못되었다고 목숨 걸고 항의하지 않는다. 스포츠에는 심판의 판정이 개입되기 때문에 억울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고 즐기는 것이다. 

이제 대통령선거가 마지막 골인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너무 심각한 상대 진영에 대하여 사생결단의 모습으로 싸우는 것을 보게 된다.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사람이 얼마나 뻔뻔할 수 있는 가를 서로 보여주는 것 같다. 억울한 판정을 당해도 스포츠는 판을 뒤엎지는 않는다. 입장이 달라도, 억울한 일이 생긴다 해도, 유연하게 성숙하게 즐길 줄 아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가? 이러한 장면을 지켜보는 국민들조차도 마음이 격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갈등은 대부분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작고 사소한 일에 흥분을 하고, 큰 소리가 나오고, 목숨을 걸 듯이 다투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화낼 일인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주 작은 보잘 것 없는 일에 쉽게 흥분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때로는 원칙과 법을 앞세우는 사람이 가장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장로님과 목사님이 서로 유연하게 존중하고 서로의 역할을 즐기는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장애물은 넘어가라고 생겨난 것이다. 작은 일에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한다. 좀 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상황을 즐기는 여유가 필요하다. 특히 신앙생활에서 그러하다. 결국은 즐기는 자가 승리하기 때문이다. 

김영걸 목사

<포항동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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