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아브라함 링컨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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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거룩한 역사적 대통령

감리교회, 인도주의 위해 수천 명의 신도•목사 북군부대 파송

1865년 4월 14일 금요일 저녁 8시가 조금 지나서 링컨 대통령 부부는 워싱턴 D. C에 있는 포드 극장으로 <우리 미국인 사촌(Our American Cousin)>이라는 연극을 관람하러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10시 12분경, 포드 극장 2층 특별석에 자리를 정하고 앉아 연극을 관람하고 있을 때 경호원 존 파커는 잠시 극의 막간에 링컨의 마부들과 한잔하기 위해 옆의 Star Saloon으로 나가 있었다. 대통령은 발코니의 관람석에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었다. 기회를 노리던 부스는 뒤에서 기어 나와 오후 10시 13분 대통령의 뒤통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군의관 찰스 렐레(Charles Leale)는 링컨의 부상을 치명상으로 진단했으며, 링컨을 패터슨 하우스(Peterson House)로 옮겼다. 약 9시간 뒤인 4월 15일 아침 7시 22분 링컨의 사망이 발표되었다. 전쟁 서기관 스탠턴(Stanton)이 경례를 하고 “이분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후 장로교 목사 피니스 D. 거레이(Phineas Densmore Gurley)가 임종 기도를 했다. 링컨이 암살당한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수난절이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링컨에게서 조지 워싱턴과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느낀다고 했다. 비 내리는 동안 링컨의 시신은 장로 교인들의 예를 갖추어 백악관으로 옮겨졌으며 교회들은 조종을 울렸다. 암살 다음 날 부통령 존슨이 오전 10시 대통령 선서를 했으며 링컨의 시신은 기차로 매장지인 스프링필드로 옮겼다. 그는 미국 역사에서 최초의 암살당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생전에 암살을 예견했다. 피살되기 1년 전인 1864년에는 “만약 내가 암살자의 손에 죽어야 한다면 나는 분명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까지는 나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암살자 부스는 재판도 받기 전에 의문사 했다고도 하고, 사건 후 10일간 추적을 당하다가 워싱턴 D. C에서 30마일 남쪽에 있는 버지니아 가렛의 농장에서 발견되어 병사들에게 사살되었다고도 했다. 링컨의 시신은 4년 전 대통령이 워싱턴으로 달려왔던 기차에 실려 다시 그의 고향 스프링필드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1861년 개회된 장로교회의 총회는 <미합중국의 보전을 영구화하고 또 증진하며 우리의 숭고한 헌법 아래 모든 기능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연방정부를 권장하고>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러한 결의문은 뉴욕에 있는 <Brick 장로교회>의 가디너(Gardiner)박사에 의해 제기되었다. 감리교회는 하나님과 인도주의를 위하여 수천 명의 신도들과 목사들을 북군부대에 파송했으며, 잔인하고 사악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제공하겠다고 서약하였다.

전쟁이 시작될 때 총 명령이 발표되어 각 연대마다 한 사람의 군목을 허락하고 특별히 목사는 정식으로 안수 받은 목회자이어야 했다. 병원에도 목사가 필요하다는 일에 링컨 대통령은 의회를 통해 결의하였다. 이때 감리교회에서는 500명의 군목을 보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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