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평신도 운동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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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부터 1975년 초까지 3년 동안은 내가 대전노회 평신도 연합회장을 맡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고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 모임은 언제부턴지 남선교회로 바뀌었다. 지금은 노회 남선교회장을 하려면 장로라야 하지만 선거운동이 보통이 아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도 회장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집사로서 유례가 없는 회장을 3년이나 연임하였다. 어떻게 집사가 회장을 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없었다. 아무튼, 그동안 나는 각 교회에 다니면서 평신도회를 조직하라고 역설하고 다녔다. 

먼저 각 교회에서의 평신도에 대한 인식의 혼란을 불식하는 일이었다. 평신도는 종교개혁 당시 마틴 루터가 “기독교인은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겨레로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만인 제사론에 기조를 둔 것이어서 평신도는 자기들이 제사장이라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목사의 주장은 “내가 제사장인데 평신도인 너희도 제사장이라니 말이 되느냐?”라고 반문했다. 지금 말하는 제사장은 구약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집전하는, 그리고 제물을 바치는 그런 제사장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신 그 제사장으로 모든 평신도는 세상에 대해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사이를 중보하는 제사장이라고 가능한 설명을 했지만, 이 모임은 목사에 대한 도전이라고 거부당하였다. 

다음은 평신도가 자기는 제사장이라고 세상에 나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나가 전도하려면 각 교회에 이미 전도부가 있고 연합으로는 남자는 청·장년면려회가 있으며 여자 쪽은 전국 여전도연합회가 있는데 교회 안에 또 하나의 평신도회를 조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평신도의 역할은 교회로 불신자를 인도하여 오게 하는 전도가 아니고 평신도 각자가 세상으로 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삶을 보임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이루어지도록 불신자에게 제사장의 역할을 하는 일이다. 주일은 목사의 영도 하에 모이는 교회이고 나머지 6일은 흩어진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다행히 전국 신학교에서는 ‘평신도학’을 개설해서 신학생들을 개도하고 또 평신도 훈련원을 두어 교인들에게 평신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연합회가 지교회를 지원하고 지교회가 실천할 수 있는 유익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일을 찾았다. 대부분 참여 교회가 농촌 교회였기 때문에 계간으로 모임을 하고, 과수 재배, 약초 재배, 비닐하우스, 양봉, 기타 영농 경영 일반에 관해 한 가지씩이라도 전문인을 초청하여 기술 전수를 하는 일을 하였다. 평신도회 운영기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매월 둘째 주 오후 3시에는 지교회 임원들이 모여 월례회를 갖고 평신도 활동 보고 등을 통해 정보교환을 하며 이 활동에 부합한 사례보고를 듣는 일이었다. 이 외에도 한시적이었지만, 교회 연합활동을 강조하여 1973년 12월 6일에는 성탄 축하 연합음악 예배를 13교회가 드리기도 했다. 연습은 각각 교회에서 하고 연합으로는 대전 제일예배당에 모여 연습했고 지휘는 숭전대학의 합창단 지휘자였던 이경우 선생이 맡았었다. 피아노 반주는 대전신학교 교장이었던 이디모데 목사의 부인이셨던 이계숙(Kay, C. Lee) 선생이 맡아 주셨는데 이 합창 활동에 목사님은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날 가톨릭 문화회관에는 430여 명의 청중이 모여서 120여 명의 연합 성가대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은 바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1974년 1월 8일부터 10일까지 2박 3일간 충남, 충북, 대전 3개 노회가 연합으로 대전신학교에서 평신도 세미나를 개최한 일이다. 참가 인원은 29명으로 비록 수는 적었지만 “내 일터에서 복음을 증거하자.”라는 주제의 성령 충만한 집회였다. 이 일에는 평신도 훈련원장이신 김형준 목사와 대전신학교 교장이셨던 이디모데 목사의 큰 도움이 있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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