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중국선교 100년과  김영훈  목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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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목사가 진정 다시 선교사의 길을 걷기 위해서 장로회 총회에 청원서를 보낸 것인지, 아니면 선교사의 신분으로 중국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청원한 것인지 또는 귀국을 위한 예비 조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김영훈 목사의 청원을 전도부로 보냈고, 또한 마포삼열 목사에게 위탁하여 자세히 알아보도록 처리하였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던 김영훈 목사는 1921년 10월 13일에 열린 감리교 지방회에서 새크라멘토 관리목사 직을 내려놓게 된다.

스탁톤에서 개최된 감리교 지방회에서는 김영훈, 이대위, 임정구 목사가 참석하였으며 이 회에서는 임정구 씨로 새크라멘토 교회 일을 맡아 시무토록 하고 김영훈 목사는 순행전도사로 일보도록 처리하였다.

이미 언급한대로 김영훈 목사는 미주 대한인 국민회 북미총회에서도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어 1921년 10월에는 총회장 후보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11월에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 총회 대위원회 의장 황사선 씨 사회 하에 대의원과 임원의 합석 회의를 열고 대한민국 4년도 총·부회장 정식투표를 거행하였다.

투표 총수는 213표였으며 투표 결과 김영훈의 경쟁 상대 강영승 씨는 152표를 얻었고 김영훈 목사는 61표에 그쳐 북미지방 총회 제13차 총선거에서 패배에 이르게 된다.

김영훈 목사는 북미 총회장 선거에 떨어졌으나 1922년도 북미총회 간부 임원 가운데 학무원의 직책을 맡게 된다.

1922년 3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 거류하는 한인들은 상점 문을 닫고 집집마다 대한민국 국기(國旗)를 내 걸었으며 독립선언 기념경축 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3월 1일 오후 1시, 일본 국기를 제외한 만국기(萬國旗)로 장식된 옥스트릿 한인교당에서는 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주최로 대 축하회를 거행하였다.

먼저 림정수 씨로 사회로 애국가를 불렀으며 임정구 목사의 기도와 하명원 씨의 독립선언서 낭독, 국기계양식, 김영훈 목사의 축사 낭독과 리대위, 김현구 씨의 열변으로 이어졌다.

김영훈 목사의 생애에 있어서 공식적으로는 마지막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 계양식에 참여한 순간이었다.

1922년 3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활동을 끝으로 김영훈 목사는 감리교 지방회와 미주에서의 민족독립운동을 마감하고 1922년 봄에 귀국하게 된다.

해외 독립운동 지사이자 종교가로 활동한 김영훈 목사의 고국에서의 앞날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화민국 산동 선교사(1913-1917)를 거쳐 대한인 국민회 북미 지방에서 중요 임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며 종교가로 활동한 김영훈 목사는 귀국과 동시에 민족독립 활동은 포기해야만 했다.

일제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해외에서 대한독립운동에 종사하는 한인들은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인물이라도 독립 정신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생업 활동에 전념하려 하는 자들은 위험성이 없는 자로 판단되어 온화하고 관대하게 대했다.

김영훈 목사의 내면의 변화를 알 수는 없으나 그는 1922년에 귀국하여 국내에서의 기독교 활동에 복귀하였고 반면에 동료 사병순 목사는 1924년 로스엔젤레스 지방 삼일절(三一節) 행사 이후 행적이 사라지고 1935년 8월 중국 천진에서 잠시 발견되어 그 행적에 대한 궁금증을 더해 주고 있다.

일제에게 있어서 미국 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의 중요 임원이자 미국 거주 중국인 대상으로 대한독립 외교 활동을 하던 김영훈 목사의 귀국은 반길 만한 일이었다. 미국 거주 한인들의 독립운동과 미주 중국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던 독립운동 인사가 자동적으로 제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언급한대로 1921년 가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김영훈 목사의 청원 즉 중극 산동으로 다시 보내달라는 청원을 전도부로 보냈고, 또한 마포삼열 목사에게 위탁하여 자세히 알아보도록 처리하였다.

김영훈과 마포삼열 선교사와의 만남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여 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김영훈 목사는 귀국하는 것으로 방향을 정하였고 1922년 봄에 귀국하여 고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1922년 봄에 귀국한 김영훈 목사는 더 이상 1913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산동 선교사로 갔다가 미국으로 건너가던 당시의 김영훈은 아니었다.

중국과 미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넓은 세계관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국에서의 목회 활동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김영훈 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의산노회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22년 8월 29일, 평안북도 의주읍 동예배당에서 제8회 의산노회가 개회되었으며 새임원으로 회장 위대모(魏大模) 선교사, 부회장 조정벽(趙鼎壁), 서기 홍하순(洪河順), 부서기 최득의(崔得義), 회계 강성태(姜性泰), 부회계 리윤각(李允珏) 제 씨가 선출되었고 의주 서(西)교회 임시목사로 김영훈 목사의 신임(新任)이 허락되었다.

의주읍 서교회는 김창건 목사가 시무하였으나 교무불근신(敎務不謹愼)한 혐의(嫌疑)로 전교회(全敎會)가 불신임(不信任)하는 형편이어서 제직원회(諸職員會)와 의산노회 시찰부원(視察部員)이 합동결의(合同決議)하여 시무(視務)를 정지(停止)토록 하고 미국에서 귀국한 김영훈 목사로 임시시무토록 한 상황이었다.

김영훈 목사는 제8회 의산노회에 출석하여 곧 총회총대로도 선출되었다.

의산노회 소속 서양 선교사 위대포, 남행리(南行理) 그리고 목사 김석항(金碩伉), 안승원(安承源), 최득의, 림준철(林俊哲), 김영훈이 목사총대로 선출되었다.

김영훈 목사는 의산노회에서 목사총대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나 1922년 9월, 경성(서울)에서 개최된 제11회 총회에는 불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목사 부총대였던 한석진(韓錫晉) 목사가 대신 참석하였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의산노회 산하에는 70여 교회가 있었으며 제8회 의산노회에 선교사 2명, 목사 15명, 장로 45명, 합하여 62명이 참석하였다.

김영훈 목사는 귀국하자마자 의산노회에서 영향력있는 목사로 활동하게 된다.

김영훈 목사의 의주읍 서교회 시무 사실은 192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록 의산노회 보고에도 나타나고 있다.

“목사 二十인중 신학준사 최득의, 림준철 량 시는 목사로 장립하였사오며 김영훈 시는 의주읍 서교회에서 시무케 하였사오며 김병조 시는 상해선인교회에서 시무하오며”

김교철 목사

<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GMS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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