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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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상주까지 (50) 

인류 역사에서 기록은 그런 점에서 중요한 인류사 연구의 중요한 수단이다. 배위량은 어떤 선교사보다도 기록을 많이 남긴 선각자로서 중요한 정보를 지금과 미래의 한국교회에 선물했다. 

이제는 배위량이 자신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때문에 지방관리에게 도움 요청한 일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배위량은 상주 사람들이 자신을 구경하기 위해 많이 몰려든 이유를 “이들은 분명 외국인을 거의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지금도 서양 어느 나라 시골에 동양인이 여행을 가면 현지인들이 그들을 관심있게 지켜본다. 우리 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양인을 거의 보지 못하는 산골 마을에 서양인이 나타나 밥도 사먹고, 잠도 자고, 책을 판다면, 그 마을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구경을 나올 것이다. 1893년 배위량이 제2차 순회전도여행을 떠난 그 당시는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1871년부터 시작된 쇄국정책(鎖國政策)이 철폐되었다. 1876년(고종 13년) 음력 2월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또는 병자수호조약)을 일본과 체결하면서 근대적 문호 개방을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 아래서 배위량은 아마도 상주에 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연히 상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배위량은 아래와 같이 일기에 적시한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들어서,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 보내주도록 이 지방 관리에게 요청해야만 했다. […] 관리는 매우 친절하고 적극적이었다. 그는 수차례 찾아왔고, 우리가 요청한 것을 들어주었다. 이들은 분명 외국인을 거의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 그에게 말 한 필을 7달러를 곧 670냥을 받고 팔았다.  

서양인이 상주에 나타나서 그냥 구경만 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책도 팔고 전도도 한다. 이상하고 재미가 있었을 것이다. 배위량은 많은 상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와 구경을 하니 통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배위량은 관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마도 배위량은 이 순회전도여행을 나오면서 준비 없이 무턱대고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외국인들도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조선 땅을 여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배위량도 이런 여행증명서를 조선 조정으로부터 발급받아 여행을 했다. 그렇기에 그는 어려움이 있을 때 관청의 도움을 요청했다. 상주에서도 배위량 순회전도단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인파가 배위량을 구경하기 위하여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관청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자 관청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그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친절하게 대한 것을 기록하였다. 

어느 나라든 해외에 선교사로 나가게 되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고 그 나라 언어를 깨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과 아울러 그 나라의 지리적인 상황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조선에 파견된 초기 선교사 배위량을 알아갈수록 그는 뛰어난 선교사적인 자질을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쓴 일기에 조선이 처한 지정학적인 위치와 역사를 이해하고 있었고 그는 자신이 전도여행을 나온 지역에 대한 지리적인 식견도 상당히 가지고 여행을 출발했던 것 같다. 지금도 어떤 지역을 순례하는 일을 진행해 보면 거의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자신이 순례할 지역의 지리와 역사 문화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하고 참가한다. 하긴 필자도 독일서 연구년 1년을 지내면서 우연한 기회에 산티아고 순례를 감행하면서 사전 지식이 없이 거의 무작정 40여 일간을 순례를 했다.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나면 매일매일 새로운 환경을 접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는 기대감이 있어 좋은 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지식이 없이 떠나는 여행은 무모하고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순례를 떠날 때 신중히 결정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만약 필자가 미리 준비를 한 후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났다면,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을 미리 정하고 그곳을 찾아보고 그 후기에 대하여 반드시 기록에 남겨야 할 것들을 기록했을 텐데, 필자는 그렇지를 못했다. 산티아고 소개 책자나 어떤 좋은 지도 한 장도 없이, 하루하루 그날그날 기대를 가지고 길을 떠나면서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도시 생장피에르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산티아고 순례 참가비 2유로를 지불하니, 복사 종이에 인쇄된 간단한 지도 두 장과 조개 껍질 한 개를 선물로 주었다. 조개껍데기는 순례자들이 가방 밖에 매달고 길을 간다. 필자도 그 조개껍데기를 가방에 매달고 40여일 간의 순례를 했다. 그리고 간단한 그 지도가 나의 유일한 순례 동반자였다. 달랑 그 지도만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냥 무작정 길을 떠나면, 여행자가 당할 수 있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어려움과 고생은 덤이 된다. 필자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그런 고생과 어려움을 덤으로 가지고 길을 걸었다. 그래도 필자는 순례 중간에 여러 서점과 여행 사무소에 즐비하게 진열된 순례 안내 책자나 자세한 지도를 사지 않고 그냥 길을 갔다. 물론 계획이 없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경제적인 지출이 염려된 점도 작용했지만, 내일 무슨 일을 당하고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길 가면서 어떤 사람과 동행이 될지 등등 내일에 대한 호기심으로 하루하루를 맞이했고 그런 마음으로 길을 걸었다. 그렇게 무모하게 산티아고 순례를 했기에 느낀 점도 많았고 그런 느낌을 일기 형식의 글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를 한지 벌써 6년이 가까이 다가오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하여 아직까지 글을 쓸 엄두를 못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당시에 진행했던 정류 이상근 박사에 대한 연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고 정류 연구를 시작하고 진행하면서 만나게 된 배위량에 대한 공부와 활동에 빠져 산티아고 길에 대한 글은 시작도 못했다. 그때 바로 기록한 글을 중심으로 새롭게 얻은 지식으로 글을 쓸 수 있었다면 좀 더 생생하게 산티아고를 경험한 느낌을 쓸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을 하지 못함이 참 아쉽다. 

언젠가 다시 낡은 그 기록을 바탕으로 글을 쓸 수 있다 해도, 그때 그 당시의 생생한 기억과 그 당시 마음에 담겨진 소감들을 다 살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점은 분명히 아쉬운 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내내 한국에 배위량 순례길을 만들 생각을 하면서 산티아고 길을 걸었기에, 산티아고 순례에 대한 책을 저술한다면 생생한 기억에 의거한 글은 아닐지라도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비되는 배위량 순례길을 반추하면서 글을 작성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글은 산티아고 순례를 한 사람이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고 반추하면서 현재를 기록하는 글이 된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튼 필자는 2015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난 뒤에 2015년도 2학기에 영남신학대학교로 복귀한 이후 지금까지 배위량 순례길을 찾고 걷고 하면서 그것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2020년 3월부터 2021년 12월까지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로 배위량 순례단이 공식적으로 순례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2022년 1월부터 다시 순례를 시작하게 되었다. 통상 필자는 1년 중에 약 한 달은 배위량 길 순례를 위해 길을 나선 것 같다. 때때로 순례단을 조직하거나 영남신학대학교 배위량 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순례를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혼자 길을 걸었다. 그것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아무도 함께 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배위량 길을 걷는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길과 꼭 같다. 힘들고 어렵고 피곤하다. 하지만 아울러 신나고 재미있고 생기 넘치는 일이다. 함께 걷는 길은 더욱 신나고 의미있고 즐겁다. 혼자 걷는 길도 여러모로 유익함을 가져다 주지만, 혼자 걷는 길은 위험하고 어렵고 힘들다. 어떤 위험에 부딪혔을 때 혼자 보다는 둘이 더 좋고, 둘 보다는 셋이 더 좋다. 필자도 혼자 순례하면서 무수한 난관과 어려움에 부닥친 일이 부지기수다. 그래서 이젠 같이 순례할 수 있는 많은 이웃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한다. 이 일은 정말 미래의 한국교회에 남길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혼자서나 소수의 사람으로는 절대 어렵다. 많은 다수의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참여하고 노력하고 힘을 쏟아야 할 일이고 그런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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