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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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상주까지 (52)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필자는 아시아는 유럽보다 더 오래된 대륙이고, 한국은 더 오래된 나라인데, 왜 이런 순례길이 없을까, 생각하는 기회를 가졌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40여 일 걸으면서 필자는 생각의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경험을 했다. 한없이 펼쳐진 산티아고 순례길에 놓여진 광야길을 1주일 이상 걷기도 했고 외로운 산길과 들길을 홀로 걷기도 했다. 캄캄한 밤에 등불도 없어 외로운 산길을 걷고 걸어 낯선 도시에 있는 여행자 숙소인 알베르게를 찾아가 잠을 잤다. 그럴 경우, 새벽 미명에 일어나 다음 행선지를 향해 길을 떠나기 위하여 마른 빵을 먹고 길을 떠났던 경험, 길을 걸어가다 큰 소나기를 만나 배낭이고 옷이고 흠뻑 젖었던 경험도 있고 40도 이상 되는 불볕 더위 속에 목이 말라 고생고생하며 걷기도 했다. 아름다운 산티아고 길은 미학적인 아름다움과, 문화와 역사를 품은 길이다. 이런 길이 한국에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끝없이 펼쳐진 길을 걸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무엇이고 어떤 역사적인 의미가 있고 그 길이 한국교회와 민족에게 어떤 연관을 맺을 수 있을지, 그리고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 것인가? 그리고 그 길을 찾는다해도 어떤 역사적인 근거를 찾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할 수 있을까? 그 때 필자의 머리에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정류 이상근을 연구하면서 알았던 숭실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초대 학장이었던 ‘배위량’(裵偉良, 윌리엄 마틴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1862년 6월 16일-1931년 11월 29일])이 생각났다. 그는 조선에 온 초기 선교사 그룹이었고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한 선교 업적을 남겼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대구제일교회 역사 제일 앞부분에 등장한다. 정류를 알기 위하여 대구제일교회 역사를 공부하다가 배위량을 다시 만났고, 그가 영남지역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여러 지역 그리고 북한 지역에서 여러 번, 여러 곳을 순회 전도 여행했던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국 여러 지역을 다 돌아보기는 쉽지 않고 필자가 살고 있는 영남지역을 우선 대상을 하여 순례를 시작하자 생각했다. 그래서 인상적 눈에 띄는 길이 배위량의 제2차 순회전도 여행길이었다. 그것은 1893년 4월 18일 배위량이 부산 동래에서 출발하여 범어사, 양산 물금, 밀양, 청도, 대구, 동명, 구미 해평, 상주 낙동, 상주, 예천 용궁, 안동 풍산, 안동, 의성, 영천 신녕, 영천, 경주, 울산, 부산에 5월 20일 까지 순회전도 여행을 감행한 길이다. 배위량은 이렇게 꼬박 한 달 동안 영남지역 전도를 위해 서양인로서 영남 내륙지역으로 들어가 전도 활동을 한 첫 사람으로 나들이를 했다. 그는 순회 전도 여행을 하면서 자신이 주재했던 영남지역선교 본부를 새롭게 건설하기 위하여 지역을 답사하는 일을 감행했다.  

필자는 정류를 통하여 배위량이 영남지역 선교를 위하여 1893년 4월부터 영남 내륙 지역을 1달 이상 순회전도 여행을 감행한 사실을 안 뒤에 이런 일을 행한 분도 있었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그것은 필자가 우선 해야할 일에 일이 있었기에 그 일을 하느라, 더 이상 배위량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2015년 4월부터 시작된 산티아고 순례길 순례를 하면서 한국에도 이런 순례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산티아고 길을 순례와 더불어 배위량이 순회전도 여행을 위해 어려움 속에서 걸었던 길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배위량을 생각하면서부터 산티아고 길과 배위량의 순회 전도 여행길의 조합을 맞추느라, 그 생각에 골몰하게 되었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 생각이 산티아고 순례를 하는 40여 일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2015년 8월 말에 1년간의 연구년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온 뒤에도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 일을 할 것인가?  

필자는 연구년 1년을 마치고 2015년 8월 말에 한국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배위량길을 찾고 순례길로 만들 생각을 했다. 그런 계획으로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찾고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필자는 1년간의 연구년에서 복귀한 2015년 2학기에 영남신학대학교 안에 배위량 길 순례 동아리를 조직하고자 동료 교수들과 학생들을 만나고 그런 당위성을 설명하고 무언가를 시작하자고 설득했다. 그러나 필자의 노력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있었지만, 다들 바빠서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한동안 배위량 순례 동아리는 동아리 지도교수를 자처한 필자 혼자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배위량 순례길에 대한 연구가 끝나게 되었다. 영남신학대학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밀양에서부터 청도까지 먼저 순례를 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수업이 없는 날을 택하고 도보 순례를 하기 위하여 11월 14일(토) 아침에 밀양으로 기차를 타고 가서 청도까지 배위량선교사가 1893년 4월 21일에 걸었던 길을 찾고 도보로 순례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함께 배위량길 도보 순례를 할 순례단을 모집했다. 그런데 모두들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했던지,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영남신학대학교 신대원 1학년 학생 중에서 필자의 신약개론 수업을 들었던 김완영 장로가 순례단원으로 함께 걷겠다고 신청을 했다. 많은 사림이 함께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순례단을 조직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밀양에서 청도까지 순례하기로 하고 밀양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날 필자는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밀양역으로 갔다. 약속시간 보다 30여분 일찍 도착하여 밀양역 앞에 있는 역전 파출소로 가서 청도 가는 길을 물으니, 경찰들이 왜 그 길을 묻는지? 질문했다. 그래서 그 분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짧은 지식이지만, 부지런히 배위량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그가 개화기에 순회전도를 다닌 길을 도보로 걷고자 한다고 말하니, 경찰분들이 매우 경이로워 하면서 위험하고 힘이 드는 일이니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가라고 권했다. 그래서 배위량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 후 도보 순례를 하고자 한다는 말을 하니, 어려울 것인데, 하면서도 자세하게 길을 안내하였다. 그 말을 숙지하고 어렵지만, 청도까지 첫 순례길을 도보로 걷고자 마음을 먹고 김완영 장로를 만나기 위하여 밀양역으로 가서 밀양역 앞에서 대망의 배위량 순례단(순례단장: 배재욱, 단원: 김완영)의 역사적인 첫 조직을 한 후 순례의 첫 걸음을 떼었다.

이 사진에 보면 필자와 김완영 장로가 들고 있는 종이는 A3 용지에 <베어드순례길 밀양-청도 베어드 순례길 동아리 2015.11.14(토)>라고 쓴 글은 필자가 준비한 것인데, 당시에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귀중한 역사적인 자료인 것 같다. 밀양역에서 역사적이고 귀중한 배위량 순례단의 첫 조직과 순례의 첫 발을 떼면서, 출발기도를 필자가 한 후 우선 밀양교회를 목표로 하여 밀양역에서 밀양교회까지 걸었다. 밀양교회에 가서 당시 박태부 밀양교회 담임목사를 만나 밀양교회의 역사에 관하여 들었다. 성실하고 좋은 목회자의 상을 볼 수 있어 참 좋았다. 그 후 배위량이 1893년 4월 20일 밀양에 입성한 후 가서 보고 자신의 일기에 소개했던 영남루를 방문했다. 필자는 그 때 영남루를 처음으로 가 보았다. 밀양강 변에 놓인 영남루의 명성에 걸맞게 영남루는 건축학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대단히 뛰어난 건축물이었다. 영남루를 본 후에 배위량 선교사가 1893년 4월 20일 밤에 잠을 잤던 유천을 방문하고자 유천까지 길을 걸어가고자 나섰다. 그런데, 김완영 장로가 “교수님 이제 밀양역으로 가시지요”라고 한다. 그래서 내가 “아니 우리가 밀양에서 청도까지 도보로 순례하기로 하고 나왔는데, 왜 밀양역으로 다시 가자고 하십니까?” 물으니, “교수님 못 갑니다. 여기서 청도 가자면 길도 멀고 다 차가 많이 다니는 길이라서 위험해서 못 갑니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는 “그래도 여기까지 큰마음 먹고 왔고 내가 오면서 밀양에서 청도까지 가는 길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왔으니, 물어가면서 한번 걸어 가 보시지요”라고 말하니, “교수님 사실은 제가 대구에서 밀양으로 오면서 제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장로님은 차를 타고 유천으로 오시고 저는 걸어서 갈 거니 유천에서 만나지요”라고 하니 “어떻게 여기서 그곳까지 간답니까? 못 갑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첫 순례부터 이산가족으로 뿔뿔이 헤어지는 것도 좋은 순례단 출발이 아닐 듯하여 밀양루에서 밀양역까지 다시 돌아와 승용차로 상동역으로 갔다. 

그 이유는 밀양에서 유천역을 찾으니, 아무도 몰랐다. 나중에 나이드신 노인들에게 여쭈어 보니, 상동역으로 가면 아마도 알 것이니, 그곳까지 가서 물어 보라고 한다. 청도-밀양구간의 경부선 선로가 직선으로 바뀌면서 유천역이 밀양시 상동면 소재지인 상동리로 옮겨졌고 역이름도 유천역에서 상동역으로 바뀌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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