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달란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들 (325) 우남 이승만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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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옥중 학교를 열었다. 15명의 어린이를 가르쳤다. 1902년 12월 선교사들이 차입해준 책 523권으로 옥중 도서실을 열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영한사전을 집필하다가 <독립정신>을 썼다. 감옥 생활 마지막 해인 1904년 2월부터 6월 사이에 급히 썼다. <독립정신>의 주제는 조선왕국의 ‘독립 보존’이었다. 아직은 나라가 망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처방은 부국강병과 문명개화였다. 탈고된 <독립정신> 원고는 박용만이 비밀리에 빼냈다. 이 글은 1910년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들과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상동교회 청년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민영환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4일 떠났다. 그러나 테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접촉에 실패했다. 그 후 이승만은 공부를 시작했다. 워싱턴에서 커버넌트 장로교회의 햄린(Lewis Hamlin)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선교사 언더우드의 추천서에는 “이승만은 그의 조국에서 위험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수년간 정치범으로 복역했던 한국의 기독교인입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지난해 저도 감옥에서 수감자들과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습니다”였다. 이승만은 목사가 되기 위해 ‘목회 장학금’을 받고 1905년 2월 조지 워싱턴 대학 2학년에 편입했다. 2년 후 졸업하고 9월 하버드 대학 석사 과정을 1년 만에 마쳤다. 그는 귀국을 원했으나 부친의 만류로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1910년 봄,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했다. 그는 미국 신문에 조선을 알리는 글을 썼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이 일제에 합병되었다. 이승만은 9월 3일 뉴욕을 출발, 리버풀, 런던,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일본인 감시를 피해 만주를 통해 귀국했다. 그는 YMCA에서 성경과 <만국공법>을 가르쳤고 전국적으로 학생, 청년들에게 연설하다 체포되었으나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1912년 5월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 열리는 세계 감리교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913년 2월 3일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부친의 부음을 들었다. 그는 <한국교회 핍박>을 썼다. 이한우는 “<독립정신>이 잘 정리된 개화 지침서라면 <한국교회 핍박>은 “이승만 박사의 학식과 정신, 그리고 체험이 농축되었다. 이 책의 양대 축은 애국정신과 기독교 신앙이다. 이 책은 이 두 가지 축을 식민지 한국이라는 조건 하에서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역작이었다”고 했다.

“이승만은 일본이 한국교회를 핍박한 것은 교회와 민족과의 깊은 관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05인 사건을 중심으로 일본의 탄압사례와 동기, 기독교가 한국의 독립을 되찾는데 도움을 줄 수밖에 없는 외교상의 이유와 내치상의 이유들을 조목조목 열거했다. 이승만은 ‘핍박’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이승만 특유의 고난 신학이요 십자가 신학이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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