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수형번호 675번, 춘원 이광수 법정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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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49년 4월, 지난 달 3월에 이어 오늘은 2차 공판이 열리고 있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서소문 4호 법정이다. 이윽고 서순영(徐淳永) 재판장이 입장하였다. 일제 강점기 친일 변절, 민족 반역 행위를 한 죄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정에 죄수들이 줄줄이 끌려 나왔다.

푸른 수의에 손은 모두 투박한 오랏줄에 묶여 있고, 신발은 검정 고무신을 초라하게 신고 있었다. 법정은 만장한 방청객들로 매우 소란스럽다. “친일 변절자, 민족 배신자, 매국노! 이광수를 처단하라!”

어디서 동원되었는지 알 수 없는 여러 단체 회원들이 법정이 떠나가라 마구 소리를 요란하게 질러 댄다. “조용히들 하시오! 공무 집행이오.”

검찰관이 법정 질서를 위해 경비 수위를 큰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경비! 뭘하고 있소? 저 자들을 좌정시키시오!” 얼마 후 법정이 조용해지자, 검찰관은 목청을 세워 죄수 번호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수형번호 675번.” 번호를 크게 불러대는 반민특위 특별부 검사의 목소리가 4호 법정을 차갑게 흔들고 있었다. “네.” “이름을 대시오.” “이광수입니다.” 

이어 다음 수형번호를 부를 때마다 기가 죽은 최남선, 노천명, 최린 등 피고인들이 모기소리 만큼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있었다. “피고 이광수.” “네.”

“피고는 민족의 지성이었고 희망이었다는 사실을 아시오? 피고는 그 누구보다 공공의 혜택을 받은 자이며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혜택을 받은 자의 의무와 책임감, 다른 것을 다 떠나 피고의 그 가벼운 행동, 반민족의 변절자로 동족을 배신하고 매국하였으므로… (이하 중략) … 그러므로 본 검사는 피고에게 유죄를 선언하노라”하며 담당 검찰관이 논고를 했다.

이어 판사가 선고를 하기 전에 피고들에게 최후 진술을 허락한다고 하였다. “피고! 할 말 있으면 말해 보시오. 독립운동을 잘 하다가 왜 갑자기 친일, 변절했는지…”

특별부 담당 판사도 이것이 궁금하다는 듯 이광수를 싸늘하게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투박한 밧줄에 묶인 춘원의 핏기 없는 얼굴이 심한 경련으로 한 쪽 눈자위가 몹시 흔들거리고 있었다.

“……” 말없이 앉아 았는 이광수의 왼쪽 눈자위는 계속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최후 진술이 없으면 지금 바로 선고하겠소.” 재판장 서순영이, 속사포식으로 말하면서 재판을 급히 마치려고 했다. “아니오! 최후 진술이 있소. 말하겠소.” 춘원이 비틀거리며 앉은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섰다. “왜 친일, 변절했는지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말하시오.”

판사는 차갑게, 그러면서 속사포처럼 빠른 말씨로 또 주의를 환기시켰다. 춘원은 천천히, 그러면서 또렷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한들, 그것은 다 부질없는 것이며 모두 다 변명에 불과하다 말하겠지요. 나는 일찍 잡지 「개벽」에서 나의 <민족개조론>을 주장한 바 있소마는, 우리 민족이 진정한 독립을 하려면 일본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때 그런 힘이 없었소.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 민족성에는 대략 여덟 가지 정도 아주 고질적인 병폐가 있는데 이것을 고치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정말 희망이 없다고 했소.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힘을 길러, 우리 민족을 깊은 잠에서 깨우쳐야 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소. 아무것도 모르는 채 조선이 그때까지 일본의 은밀하고도 소름끼치는 인간 말상정책에 의해 견디지 못하고 나라 전체 모든 인재와 근간이 뿌리째 다 뽑혀 죽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재기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진다고 말했소.”

“피고의 <민족개조론>은 무엇이며 우리 민족성의 여덟 가지 고질적인 병폐란 도대체 뭣이오? 피고가 무슨 선각자라구?” 서순영 재판장이 비꼬는 듯 냉소하며 질문을 했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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