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32) 배위량 순례단의 역사(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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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일(수) 밤예배시에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는 밀양시민교회에서 그리고 필자는 밀양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때 제 2차 전도여행 123주년맞이 기념 제 1회 도보순례 및 길 위의 학술대회 행사를 위하여 고신대 이상규 교수는 밀양시민교회에서 배위량의 ‘윌리엄 베어드의 선교활동’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밀양교회에서는 부산장신대 탁지일 교수가 ‘베어드의 부산, 경남선교’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로 했지만, 급한 일이 생겨 필자가 대신 밀양교회의 설교 시간에 배위량 선교사의 한국선교에 대한 말씀을 전했다. 그날이 수요예배일이라 순례에 참석한 목회자 중에서 두 분은 본교회 예배 때문에 먼저 귀가하고 필자와 이용국 목사만 남아 밀양시민교회에서 제공한 잠자리에서 그날 밤 하루를 편히 쉬었다. 

이튿날 밀양시민교회의 라철수 목사가 아침 해장국을 하는 집으로 우리를 데려가 따뜻한 국물이 있는 아침을 대접해 감사하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그 전날 걸었던 상동역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어 상동역에서 청도 팀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날따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함께 순례하기로 약속한 청도기독교연합회원분들이 몇 분이나 참석하실 수 있을지 염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청도기독교연합회 박영규 회장이 대군을 이끌고 왔다. 

상동역 광장에 모여 출발기도를 한 후 각자 가지고 온 우의를 입고 순례를 출발했다. 상동역에서 출발할 때는 비가 많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 지역민과 함께 걷는 것은 여러 가지 유익한 점이 있었다. 그해 1월에 필자 혼자 걸었을 때는 밀양역에서 청도방향의 큰 길밖에 알지 못해 위험을 무릅쓰고 큰 길의 갓길로 걸었다. 그런데 순례하는 그날에 큰 비가 왔다. “이 우중(雨中)에 갓길로 걷는 것이 위험하고 어려울 텐데 어쩌나”하고 걱정했는데, 청도 분들은 상동역에서 다시 밀양방향으로 방향을 정해 걷더니 이미 지나온 밀양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밀양강을 다시 건너 옛 철길 따라 놓여진 신작로 길을 따라 걸었다. 아마도 그 길이 영남대로라고 생각되었다. 그 길을 따라 한참 걷다가 청도기독교연합회 박영규 회장이 옛날 유천역 자리를 알려주고 그 맞은편에 있는 옥산교회의 수양관도 알려 주었다. 옥산교회 수양관 길건너 맞은 편에 옛 유천역이 있었는데 유천역은 지금은 없어지고 없다. 유천역 대신에 상동에 새로운 역을 만들었다. 옛 유천역 근처에 옛날 일본식 여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유천역이 폐역이 되면서 그 일본식 여관도 사라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은 배위량이 1893년 4월 20일 밤을 그 일본식 여관에서 잠을 잔 것으로 글을 쓴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파발마를 두었던 역이 옛 유천역이 있었던 밀양시 상동면 옥산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청도군 청도읍 초현리 일대에 있었다. 그리고 배위량이 제2차순회전도여행을 나왔던 시기에 조선내륙지역에 아직 여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1893년 밀양군 상동면 옥산리에 일본식 여관이 존재했고 배위량이 그 일본식 여관에서 잠을 잤다는 일군의 학자들의 논리는 잘못된 역사인식에 기반한 논리이다.  

그날 필자는 박영규 목사와 유천교회 최재성 목사와 함께 상동역에서 청도역까지 걸었다. 이번 순례에 동참하기 위해 첫날부터 함께 참가한 순례단원 5명 중 3명은 20일 밀양에서 대구로 돌아가고 1명은 밀양에서 청도로 순례하는 도중 가정에 급한 일이 생겨 급히 귀가했기에 필자 혼자만 끝까지 참가하게 되었다. 순례를 하고 싶어도 상황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순례행사였다. 

청도기독교연합회에서 조직한 순례단과 함께 청도역에 도착 후 청도 순례단원들과 함께 전임청도기독교연합회장 방인용 목사가 시무하는 청도대성교회로 이동했다. 그것은 그 교회가 모든 순례단원을 초청해 교회에서 점심을 대접했기 때문이다. 우중에 걷고 피곤한 몸을 따뜻한 청도추어탕으로 녹일 수 있게 되었다. 우중의 악한 조건에서 순례하느라, 피곤한 몸이 따뜻한 추어탕 한 그릇으로 피곤이 풀리고 함께 했다는 감격이 모든 순례참가자들의 얼굴에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함께함의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날의 순례 목표는 청도기독교연합회에서 1993년에 팔조령에 세운 청도선교 100주년 기념비까지였기에 점심식사 후 팔조령까지 걷기 위해 청도역으로 갔다. 다들 첫 순례라 더 이상은 순례에 참가하기 힘들다고 한다. 다행으로 대구에서 살면서 청도에 거처를 정하고 주중에는 청도에 머물며 농사일을 하시는 이학렬 장로는 오전 순례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오후 순례를 필자와 함께 하기 위해 청도역으로 왔다. 이 분은 80대 노인이시지만 등산으로 다져진 건강한 분이시라, 필자와 보조를 맞춰 청도역에서 이서 땅을 거쳐 팔조령을 올라 팔조령 꼭대기 까지 올라갔다. 우리가 팔조령 굽이굽이 돌고 돌아 정상 부분 청도쪽 사면 기슭에 서있는 청도선교 100주년 기념비까지 올라가니 팔조령 정상까지 먼저 차로 올라온 청도기독교연합회원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청도선교 100주년 기념비는 배위량이 청도에 첫 발을 들여 놓은 1893년 기점을 청도 선교 원년으로 잡고 세운 기념비이다. 청도분들은 청도가 대구보다 하루 일찍 배위량이 발을 들여 놓았다는 사실과 청도선교 100주년 기념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고 복음에 열정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날 밤에는 이번 순례에 청도기독교연합회가 함께 참여하도록 주선을 한 청도기독교연합회 전임회장인 조삼수 목사가 시무하는 청도칠곡교회에서 청도군 선교 123주년 기념예배를 청도기독교총연합회 주최로 드렸다. 이때 필자는 ‘배위량의 2차 전도 여정과 순례길로서의 가치’란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을 발표하게 된 계기는 청도기독교 총연합회 임원들과 배위량이 청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은 날짜 때문에 그분들과 필자가 논쟁을 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청도기독교연합회 모든 임원들이 배위량이 1893년 4월 22일에 청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다고 하시며 팔조령에 있는 청도선교 100주년 기념비에도 1893년 4월 22일을 기점으로 선교 원년을 잡은 것을 주장해 1893년 4월 22일은 배위량이 대구에 입성한 날이고 1893년 4월 20일 배위량이 유천에서 잠을 자고 21일에 팔조령 아래 땅인 청도군 이서면 안새월에서 잠을 잔 후 22일 아침 일찍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들어갔다. 유천은 청도유천과 밀양유천으로 나뉘어졌는데 기존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4월 20일 밤에 배위량이 잠을 잔 유천은 밀양시 상동읍이 아니라, 청도군 청도읍 초현리이기에 배위량은 1893년 4월 20일에 이미 청도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고 청도 사람들이 대구 사람들보다 최초의 선교사가 대구보다 청도에 발을 먼저 들여 놓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만약 그것에 가치를 두고자 한다면 팔조령의 경계 지점, 즉 대구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워진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청도기독교연합회가 배위량이 청도에 처음 들어온 날을 선교기점으로 잡고 그것에 가치를 두고자 한다면 1893년 4월 20일을 기준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배위량이 처음으로 청도에 발을 들여놓은 청도읍 초현리나, 청도로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청도읍 유천시장이 있는 유호리 일대에 세우는 것이 옳다고 본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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