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본 삶의 현장] 분열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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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부터 교회의 분열 양상은 구체화 되어 대화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송 목사는 교회를 사서 이전하는 문제보다는 미국 노회에 가입하느냐 마느냐가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모든 일에 앞서 이 교회가 미국 노회에 가입할 것인가 아닌가를 먼저 결정하자고 공동의회를 열었다. 갑론을박 끝에 공동의회는 노회 가입을 찬성하기로 결의했다. 드디어 교회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이 교회 교인들은 1975년 연합교회에서 나와 송 목사를 모시고 장로교회를 세우자고 분리되어 나온 창립 멤버들이었다. 갈라져 나온 이유는 연합교회는 교회가 사교(社交) 모임 같아 교회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송 목사와 뜻을 같이했던 그 그룹이 다시 4년 만에 갈라지게 된 것이다. 건축위원장을 비롯한 한 무리는 맹목적으로 목사를 추종하는 돈 있는 떼거리들이 주체성 없게 그런 결의를 했다고 분개했다. 독립교회가 왜 주체성 없이 미국 노회에 속하려고 기를 쓰느냐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협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대를 선언하고 교회 재산을 반분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목사는 교회의 자산을 나누는 것에 앞서 뜻을 같이했던 성도들을 잃어버리는 아픔이 더 컸으리라고 교회 출석 일 년도 안 되는 나는 친구인 목사가 힘들겠다는 생각만 했다. 

공동의회에 찬성한 교인들은 댈러스 북부 갈랜드(Jupiter Rd. Garland)에 있는 미국 교회를 사기로 했다. 땅도 넓었지만, 예배당도 꽤 컸다. 몇 사람 안 되는 교인이 텅 빈 예배당에서 5월 말 첫 예배를 드렸다. 개선장군도 아니며 패잔병도 아닌 우리는 마음이 아팠다. 친한 친구들을 잃은 안타까움도 있고 옆자리가 비어, 뒤에서 무슨 소리만 나도 혹 옛 교인이 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뒤돌아보곤 했다. 

7월에 들어 세 사람의 장로와 여섯 사람의 집사를 세운 뒤, 교회는 미국 노회 가입 절차를 밟았다. 이때 장로로 피선된 한 분이 덴턴에서 교수로 있는 김 박사였다. 김 박사는 영어가 유창해 가입된 노회와 교회의 원활한 관계 유지에 큰 힘이 되었다. 11월 노회에 가입 후, 송 수석 목사는 미국 노회(Grace Presbytery)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또 교회에서는 노회 절차를 따라 교인들은 공동의회를 하고 위임 절차를 마치고 목사 위임을 했다. 여성들의 참여가 많이 요구되었고 교회의 체제도 많이 바뀌었다. 먼저 제직회 회장은 집사 중에서 선거해 그 임무를 맡기고 당회와 제직회 임원이 갖는 합동회의를 하는 등 많은 생소한 제도가 도입되었다. 노회는 소속 교회가 가난해 목회자 대우를 제대로 하지 못할 때는 사례금을 보조해 주는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송 목사는 이를 거절했다. 그는 사례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다하려면 든든한 총회와 노회가 있어서 그 노선에 따라 협동해서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노회 소속을 원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노회에서 주관하는 연수나 선교 프로그램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덴턴에서 교회까지는 1시간이 더 걸리는 거리였다. 그래도 가끔 학생 중엔 나를 따라 교회에 가보고 싶다는 학생이 있었다. 75번과 635번 고속도로는 남북과 동서를 잇는 아주 급한 고가 교차로였는데 한 학생은 나를 따라오려다 속도를 줄이지 못해 사고가 날 뻔했다는 말도 했다. 그 뒤로 우리는 유학생들을 모아 덴턴 대학의 교실을 빌려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송 목사는 사모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음식도 싸 와서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그 뒤, 임무광 강도사가 뒤를 이었는데 그것이 덴턴 교회의 시작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이민 교회와 유학생들의 현주소였다. 당시 전주 기전여학교에서 나와 같이 근무했던 백화자 선생은 이곳 덴턴 대학(NTSU)의 학생으로 와 있었는데 유학생들의 어머니였다. 그 후, 귀국해서도 그녀를 잊는 사람은 많지 않다. 후에 전국여전도회 연합회 총무로 한국에서 많은 이바지를 한 분이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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