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4)  불우한 이웃의 벗이던 소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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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자를 사랑하던 어린이 ③

어려서 마을의 신동으로 불려

가난한 자의 벗이 되고 나눔

기독교 문화운동의 기수

사랑과 청빙의 짧은 생애

당시 동신교회에서 시무하던 홍동근(洪東根) 목사는 ‘크리스챤신문’에다 다음과 같은 말로써 황광은 목사를 추모했다.

황 목사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생각할수록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애인의 죽음인들 이처럼 깊은 공허와 비애를 남겨 주랴…

그의 짧은 생애는 더듬기에 어렵지 않다. 황 목사님은 1923년 2월 25일 평북 용천 한 경건한 가정에서 3대 크리스천으로 탄생했다. 그는 어려서 마을의 신동이었다.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해 이 기독교 가정의 경건 속에서 사고하는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운명처럼 허약한 몸을 지니었으나 일찍이 성프랜시스와 가가와(賀川) 그리고 소파(小波)의 세계를 한없이 동경했다. 그리하여 이 때에 이미 가난한 자의 벗이 되어 옷과 신발을 벗어주고, 또 고아와 거지를 집으로 인도해 같이 먹고 같이 사는 사랑의 경건을 즐겨 실천했다. 또 이때에 벌써 많은 노래와 이야기를 다듬어 자연과 인간을 꿈처럼 그리고 찬미했다.

1939년 전쟁이 한창일 때 16세의 소년으로 그는 행복한 가정을 뒤로 두고 가난한 자의 영원한 벗이 되고자 단신 서울로 상경했다. 삼각산 기슭 향린원은 그가 꿈에도 그리던 영혼의 안식처였다. 일제 말기에 부모 없는 고아들의 보금자리였던 향린원은 이 소년의 꿈과 사명감을 불태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는 비로소 가난한 자의 형이 되고 벗이 되는 인간의 참 기쁨과 평안을 찾았다. 이 향린원의 8년간은 그에게 보다 큰 사랑과 봉사를 위한 그의 인간성과 사상의 성장에 더없는 수도원의 훈련과 같은 것이었다. 오직 빈곤과 병약 속에서도 묵상과 독서와 실천의 경건은 그치지 않았다.

조국의 광복과 더불어 그는 이 땅의 교회와 사회를 위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자각했다. 그는 신학을 전공해 인간에의 사랑과 사회를 위한 정의감에 한층 더  깊이와 높이를 더했다. 그리고 이 땅의 시대적 요청은 또한 이 젊은 지도자의 신념과 정열과 천재성을 그대로 잠재워두려 하지 않았다.

황 목사님의 생애는 세 분야로 나누어 생각하게 된다. 우선 청소년 운동의 개척자로서 그는 제주도의 한국보육원과 난지도의 보이스 타운, 서울 중앙 YMCA와 대한 보이스카우트 등을 누비면서, 그의 20대와 30대를 전혀 이 나라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화려한 장래를 수놓아 투신했다. 그에게는 어린이가 참 인간의 꽃이요. 젊은이들이 진정 나라의 꿈이요 운명이었다. 이 무렵에 그는 미국 보이스카우트 간부학교와 필리핀의 YMCA 대학을 수학하기도 했다.

기독교 문화 운동의 기수로서의 황 목사님을 우리는 또 잊을 수 없다. 그는 해방 직후의 소위 연극 단체 <원예술좌>의 창립과 아동영화 ‘하늘은 맑건만’ 등의 제작을 비롯해, 그 후 ‘크리스챤신문’  ‘기독교교육’  ‘새벗’ 등의 창간과 편집으로 기독교의 예술 문화에 항시 개척자로 관여했다. 지난 20년간 KA, KY, KBS TV 등 방송문화에 끼친 그의 관심과 기여도 다대하다.

그중에도 우리가 황 목사님을 더 애절하게 추모하는 것은 그가 진정한 목회자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가난한 자의 배려는 목회 생활에서 모든 영혼을 위한 위로의 대화로 더 다양하게 퍼져 나갔다. 더욱이 숙명적인 질환인 병든 심장을 안고, 그는 그리스도의 치료를 바라는 모든 영혼을 향한 참 목자로서 동분서주했다.

새문안교회에서 영암교회로, 대광에서 신일에로, 고아원에서 재건대로, 대학에서 초등학교로, 사무실에서 다방으로,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문자 그대로 목사로, 설교자로, 전도자로, 강사로, 교목으로, 기획자로, 조직인으로, 기금 모금자로, 카운슬러로, 기고가로, 작가로, 예술인으로, 사상가로, 실천인으로, 특별히 트러블슈터와 화해자로 병든 이 나라 교회의 갱신과 민족에의 선교에 그의 꿈과 정열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황 목사님이야말로 새로운 시대가 요청하는 다원적인 목회자상의 그 선구자라 할 것이다. 그의 이해와 확신과 실천력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지나간 10년에 있어서 범국가적이고 범교회적인 규모의 대회로서 국제 교회 전국교역자 대회, 전국복음화 대회는 모두 그의 예지와 덕망과 정열로 이루어졌던 빛나는 역사였다.

지도자로서의 각광도 빛나려던 때에 그의 심장은 극도의 피로에 젖어 그는 남모르는 투병에 홀로 싸워야만 했다. 그는 군중 속에서 외로웠으며 끝없는 일 가운데서 피로했다.

1960년 9월 그는 고요히 물러갔다. 심장이 무겁고 아팠다. 40여 년의 쌓이고 쌓인 피로가 하루 아침에 닥쳐 왔다. 치료와 정양이 정말 필요했다. 가족들과 교회의 권유로 미국에로 여행을 결단한 것은 20년을 미룬 1970년 봄이었다. 그는 숙원이던 여행과 연구를 생각해 소년처럼 기쁘고 즐거웠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 7월 15일, 47세를 일기로 약속의 언덕을 바라본채 우리를 떠나셨다. 사랑과 청빈과 경건의 짧은 생애를 남겨 놓고서, 곁에는 고락을 같이하신 부인 김유선 여사와 사랑하던 진숙·은숙·승균·승국 4남매가 남아 있으시다.

황광은 목사님은 실로 기독교의 역사적 소임과 사명을 투철하게 의식했던 예언자적 크리스천이요, 양심적 시대인이요, 성실과 헌신으로 일관했던 진정한 지도자였다. 동시에 그는 잠자는 한국 기독교의 경종이요, 감각 잃은 이 나라 크리스천의 산 양심이었다. 그는 가난한 자와 병든 영혼을 위해 살고 죽은 예수의 참 제자였다. 어린 날의 꿈처럼 그는 성프랜시스와 가가와(賀川)와 소파(小波) 등에 속하는 이 땅의 영원한 사랑의 사도이시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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