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이화학당 김활란 선생과 7인 전도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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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인 전도대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와 중단 명령

이화학당 선생 김활란과 6인의 대학과와 보육과 재학생들로 구성된 7인 전도대의 착안은 바로 법적으로 보장되어있는 ‘신앙의 자유와 예배를 볼 수 있는 집회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려는 것이었다. 이들은 찬송, 설교, 신앙 간증을 훈련받고 전도에 나섰다. 이들이 준비한 설교 내용은 신앙과 애국심을 결합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을 위하여 필요할 때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민족의 번영과 건강, 교육 그리고 사회 경제의 개선만이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여야 한다.” 나라를 잃은 처지에서 인류를 위한 예수의 희생이 예수의 제자들의 민족을 위한 희생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한국을 식민지로 삼킨 일본 경찰의 감시가 이들 전도대를 따라다닌 것은 당연했다. 낮에는 가가호호 방문하거나 일하고 있는 밭과 들을 찾아가 농부들을 전도했고, 밤에는 교회나 학교 건물을 빌려 강연회를 열었다. 1930년경 최남선이 한 말이 있다. “조선의 학교는 거의 예수교회 부속의 것이더니.” 당시 민족을 계몽 전도하는 공간이 바로 교회요 교회가 세운 학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기독교회가 이 땅에 들어와서 한 일,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 땅에서 한 일은 수없이 많다.

“이 운동에는 다분히 민족정신을 고취하려는 불온한 사상이 깃들어 있다”고 판단한 일본 경찰은 전도대가도 못 부르게 하고 인쇄물도 압수하고 급기야 평남 안주에서는 김활란의 강연을 중지시켰다. 또 경찰서로 연행하여 심문했다. 신앙의 자유를 호소했지만 더 이상의 강연은 불가하다고 다그쳤다. 이화학당 교장 아펜젤러 선교사까지 괴롭히고 들볶았다. “남선(남조선) 전도는 중단하고 곧 돌아오너라!”는 교장의 편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2. 1961년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간 이화여대 졸업생들

1920년 6월 여름방학을 활용한 전국적 전도 활동이 강제 중단되고 나서 얼마 후 김활란은 찬송가 하나를 짓는다. 곧 1921년 작사한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이다. 이 찬송은 현재 「통일찬송가」 461장에 실려 있다. 1931년 발행된 「신정찬송가」에는 「캄캄한 밤 쌀쌀한 바람 불 때」로 이름이 올라가 있다. 캄캄한 밤 쌀쌀한 바람, 당시 식민지 조선 농촌을 돌며 마주한 조국의 현실이 이 찬송 제목 속에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김활란은 해방 이후 이화여자대학교의 초대총장이 되었다. 그리고 “1961년에 이화여자대학교의 해외선교사로” 이화여대를 졸업한 전재옥과 조성자가 파키스탄에 해외 선교사로 파송된다. 1920년 6월 여름방학을 이용한 이화학당 김활란 선생과 6명 학생의 농촌 전도 열기가 이렇게 이슬람국가에 여대 졸업생의 가녀린 몸으로 해외 선교사로 파송된 데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간과하기는 어렵다. 김활란의 전도 열정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서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자는 1965년 전국복음화운동의 한 주역으로 나서고 있었다.

류금주 목사

<전 서울장신 교수·현 청교도신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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