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행운의 선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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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내외는 이민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고, 나이가 들면서 한국에서 생을 마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둘째 아들 직장을 위해서 더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었다.

얼마 후 7월 6일 나는 꿈을 꾸었다. 꿈에 시어머님이 보이시며 펌프에 물을 붓고 틀어 보자고 바가지에 물을 담아 주시기에 마중물을 붓고 펌프질을 해서 물을 받았는데, 땅 밑에 물이 고인 것이 다 나와서 물이 나오지를 않자 어머님께서 ‘고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을 들으며 깨어보니 꿈이었다. 꿈에 힘들게 펌프질을 해서 장딴지에 쥐가 나기도 했었다. 꿈에 본 맑은 물이 기분이 좋아서 좋은 소식이 오리라 기대하면서 컴퓨터로 메일을 열어 보았다. 둘째 아들의 소식이었다. 모 건설회사 상임고문으로 일하게 되었고, 방산업체 회사에서도 자문역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둘째 아들은 교수 생활을 접고 사업에 뜻이 있어 회사를 설립했으나 경험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부모에게 최선으로 효도하는 아들에게 축복해 주심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9월 15일에 우리 내외는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선물(1센트 동전)을 엘카미노 대학 앞에서 만난 그 목사님을 통해 나에게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1센트를 주우면 행운이라는 것을 그때까지 나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었다.

만약 그 당시 내가 생각한 대로 1센트 동전을 우습게 생각하고 받지 않았다면 아마도 행운은 나에게 오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은 누구를 통해서, 어떤 모양으로 오실지를 모른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셨다. 가장 작은 것에 감사하는 자에게 큰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샬롬!

노년에 가까워진 여고 동창생

6.25 전쟁에서 서울이 다시 재탈환되면서 휴전도 되었다. 하지만 전쟁 중 폭격으로 인해 부모님께서 고생하시며 마련하셨던 집이 타버려 춘천으로 당장 가지는 못하고 잠시 원주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춘천으로 복귀하지 못한 피난민을 위해 원주에 종합학교(춘천 남자 중·고등학교, 춘천 여자 중·고등학교, 사범학교) 분교를 세워주었다. 수업받을 천막도 학생들이 설치하고 환경은 열악했으나 피난민 남녀 학생들 모두 복학이 되어 남녀 합반을 해서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친정 아버님 함종성 교감 선생님께서 영어를 가르쳤다.

얼마 후 남자 중·고등학교와 여자 중·고등학교가 분리하게 되었다. 우리 학교는 여학생들이 직접 판잣집을 신축하였는데 대단한 작업은 아니었으나 여학생들이 건축하기에는 위험한 일이었다. 지붕 위에서 망치질하다가 다친 학생들도 있었다.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26명이 졸업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하자 나를 포함한 6명이 강원대학 부설 중교 원예과에 같이 입학을 했다. 항상 같이 수업도 받고, 함께 놀러도 다니면서 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함명숙 권사

<남가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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