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수채화 한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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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내 고향의 초등학교 후배로서 감리교회에 출석하는 서대화(徐大和, 1944~ ) 권사가 보내 준 글이다. 지난 6월 내가 《신앙산책》에 올린 글 『나의 선친에 대한 회고』를 읽고 퍽 감동받았다며 긴 댓글을 보내 주더니 “그 밭이 바로 그 밭”일는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서 이 글을 썼다고 했다. 후배의 어릴 적 기억과 그날을 그리워하는 그의 글을 여기 옮겨 적는다. 

“동네 어른들이 경안천(京安川)에서 잡은 ‘피라미’를 횟감으로 먹을 때 안주용으로 쓰려고 우리 밭에서 풋고추를 따가곤 하였다. 주인이 구슬땀을 흘려가며 지은 고추농사를 불법으로 약탈(?)해가는 이 불법 침입자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친구 분들이었다. 내가 이따금 밭에 나가 망을 보지만 그 침략자들은 주인의 엄중한(?) 감시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바구니에 수북이 풋고추를 따가곤 하였다.”

위 글은 한국장로신문의 《신앙산책》 칼럼을 연재하는 문정일 장로가 70여 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선친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 이 부분만 읽으면 불법으로 고추를 따가는 어른들을 정말로 원망하고 성토하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사실인즉 그건 아니다. 가난했어도 따듯한 인정이 오가던 시절, 몇 대바구니의 고추를 약탈(?)당한 것으로 인해 섭섭해 했던 어린 아들에게 “그래도 그 아저씨들보다는 우리가 더 많은 고추를 먹게 될 테니까 속상해할 것 없다”고 위로하며 사람이 지녀야 할 선한 심성인 나눔의 가치를 심어주신 선친께 감사하는 글이다.

6.25전쟁이 휴전으로 전투는 멈추었어도 마을은 폐허 속에서 혼란스럽고 궁핍하던 시절이었다. 피난길에서 돌아온 가정들은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폭격으로 유명(幽明)을 달리했거나 살던 터전 전체가 불타서 흔적 없이 사라져 막막한 집이 많았다. 이웃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각자가 겪은 동란 중, 힘들었던 사연을 주고받았다. 많은 어른들이 공산치하에서 부역(附逆)을 했던 사실로 인해서 죄과를 문초 당했고 더러는 후퇴하는 인민군에 끌려간 채 소식이 끊기기도 했다. 후미진 골짜기에서 적군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신들이 발견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마을은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고 소식 없던 가족의 시신을 학살의 현장에서 찾아낸 경우도 많았다. 

공산치하의 3개월 동안에 좌익분자 한 사람이 면사무소 창고에 쌓여있는 쌀가마니로 아버지를 회유(懷柔)했으나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코 받지 않으신 아버지는 치안이 회복되고 여적죄(與敵罪)를 밝힐 때, 오히려 ‘정직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우리는 비록 가난했어도 전쟁으로 인해 인명의 피해가 없었던 것에 감사하면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무렵 어느 날 우리는 경안천 냇가로 모처럼 가족 천렵(川獵)을 나섰다. 어머니는 광목(廣木) 한필을 햇볕에 탈색하기 위해서 양잿물에 삶아 빨아 널기를 반복하고 아버지와 우리 남매들은 흐르는 냇가에 발을 담그고 다슬기를 잡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전쟁과 가난한 생활로 찌들어 지내시던 어머니의 모처럼 밝은 모습을 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준비해 간 쌀로 밥을 지으시고 된장을 풀어 다슬기 국물 요리를 만드신다. 찌개가 끓는 기미를 보이자 인근의 밭에서 풋고추 한 움큼을 따다가 물에 씻어 손으로 대충 자른 뒤에 찌개에 넣어 맛을 내셨다.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남의 밭에서 주인의 허락 없이 농작물을 취해 오는 것에 대하여 우리 남매들이 느끼는 불편한 심기를 이미 눈치 채신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괜찮다. 저 고추밭은 아버지 친구의 밭이라 나중에 양해를 구하면 된다.” 라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경안천 냇가 서쪽 하늘의 노을이 빨갛게 물들 때까지 온 가족이 나들이를 즐긴 그날의 기억이 정지된 화면이 되어 그리운 정경으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1906년(丙午)생이시고 문장로의 부친께서는 1910년(庚戌)생이시라니 두 어른은 한 동네에 사시면서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친구로 지내셨을 것이다. 만약 두 분의 영혼이 우리 곁으로 내려와 이 글을 읽으신다면 착하고 정직하게 사신 분들답게 아름다운 추억이었다며 환하게 웃음으로 화답하시리라. 당시 정성스레 다슬기 찌개를 끓여주시던 젊은 아버지와 물가에 둘러앉은 우리 남매들의 어릴 적 모습이 《수채화 한 폭》이 되어 지금도 내 인생의 노을 속에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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