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한남대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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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2월 12일 나는 댈러스의 한인 장로교회에서 장로로 장립(將立)하고 일주일 후인 12월 19일 북텍사스 주립대학에서 드디어 학위를 마쳤다. 긴장이 풀려서였는지, 너무 힘들어서였는지 학위수여식이 끝날 무렵부터 배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었고 친한 친구였던 김 박사 집에서 학우들이 축하하러 모였을 때 나는 기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이 내 신장염의 초기 단계인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왜 배가 아픈지 몸이 무언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고 가족들도 걱정하였다. 

이 걱정은 이제는 귀국할 걱정으로 이어졌다.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다. 과거도 미래도 걱정하지 않고 매일 하나님만 의지하고 만나를 먹으며 현재만 생각하고 살았다. 하워드페인 대학은 1년마다 연장 계약하였는데 1983년 6월이면 떠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영주권 신청까지 해준 대학을 떠나겠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학사 부총장은 봉급의 인상까지 제안해 왔지만, 나는 그에 응할 수가 없었다. 한남대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당시 숭실대학교는 서울과 대전이 분리하여 대전캠퍼스는 교명을 한남대학으로 정하고 초대학장으로 오해진 학장이 취임한 때였다. 그는 나더러 빨리 돌아와서 대학 일을 같이하자고 권하고 있었다. 우리는 내외가 대전에 있을 때부터 여러 해 동안 Y’s man 활동을 같이해서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9월에 시작하는 2학기까지 기다리지 말고 귀교하라는 것이었다. 우리도 여기서 애들에게 송금하며 나의 영주권 절차 등 큰 비용을 써서 귀국할 여비도 갖고 있지 않을 때였다. 한남대학에 당시 재직하고 있던 서의필 목사는 댈러스의 제일장로교회에 들렀다가 나를 만나고 그 교회에 이야기해서 한남대학을 위해 일할 교수라며 재정지원을 해달라고 호소해서 나에게 여비를 만들어주고 떠났다. 댈러스 한인 장로교회에서 수고하던 황인복 전도사는 내가 떠나는 것이 확정되자 우리 두 사람 항공권 살 돈을 한 교인이 내놓았다고 나에게 가져왔다. 나는 지금도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워낙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교회에서 봉제업을 하는 집사일 거라고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나는 사랑의 빚을 졌다.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1983년 6월 나는 한남대학에 복교하여 여름 방학 중이었는데 그때부터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새 학기가 시작할 때 중앙도서관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1976년에 떠나 실로 7년 만의 귀환이었다. 그동안 학교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입학정원 30명이던 수학과는 주간 수학과가 40명, 이부(야간) 계열의 수학과가 40명으로 80명이 되고 각종 학과가 신설되어 4개 학부(문학, 이공, 경상, 법정)와 이부 야간 학과를 합해 총 32개 학과에 입학정원 2,100명의 큰 대학이 되어있었다. 입학정원이 늘었다는 것은 재정적인 여유가 생겼다는 말도 된다. 따라서 그동안 많은 부속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첫째 1977년도에 시작한 중앙도서관이 4층까지 완공되었고, 가정교육과가 들어 있는 제3 교사가 완공되고 그 곁에 문리과 대학 건물이 들어섰으며 경상대학인 사회과학관이 들어서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은 구심점을 잃고 왠지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원래 작은 대학이었던 대전캠퍼스에 큰 인물이 있을 턱이 없었다. 외국에서 유학하고 학위를 받고 온 교수들은 다 타 대학으로 옮겼고 현재 남아 있는 오랜 교수들은 5명뿐이었다. 그들이 숭전대학교일 때 각종 보직을 맡고 있다가 갑자기 그중 한 사람인 오해진 교수가 초대학장이 되고 또 종합대학이 되면 초대 총장이 되는 것인데 다른 친구에게는 배가 아픈 일이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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