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장편소설] 허영숙과의 운명적 만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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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씨즈코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허영숙은 그 자리에 한동안 있으면서 지금 자신의 뇌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고 있는 이광수의 잔영들에 대하여, 내가 왜 이럴까? 그 사람과 내가 무슨 관계라구 이러는가. 내가 미쳤어. 쓸데없는 짓, 싹 지워버리자! 허영숙은 좌우로 머리를 흔들며, 이내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는 힘있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카케’ 병원은 매주 월요일마다 병원장 방에서 의사들만의 아침 조례가 있다. 수련의들도 참석하는 시간인데 씨즈코와 허영숙은 여느 때와 같이 오늘도 함께 참석하고 있었다. 졸업 논문을 준비하는 고참들은 거의 자기 시간들을 이렇게 개인적으로 학점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리기로 한 청년 대학생, 이광수의 모습이 왜 자꾸 떠오를까? 자기를 슬픈 듯이 바라보고 서 있던 까만 사슴의 눈망울이, 오늘 아침에도 허영숙의 마음을 마구 후비고 있었다.

“영숙아! 왜 그래? 또 뭐야? 정신 차려!” 옆자리에 바짝 다가앉는 씨즈코가 오늘도 허영숙이 손놓고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한마디 했다. 아침에 출근을 하자마자 그 남자의 지난주 치료 처방전을 보고 온 씨즈코는 친구의 귀에다 대고 조용히 일러 주었다.

“이광수는 각혈 폐환자야.” “각혈이라니?” “폐병이란 말이야.” “청년 작가 이광수가 폐병환자라구?” 

허영숙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탁자를 짚고 열심히 금주 시행계획을 설명하는 부원장의 브리핑이 무슨 말인지 오늘은 전혀 귀게 들리지 않고 있었다. “상태가 안좋아?” 허영숙이 놀란 눈을 하며 물었다. “각혈이 시작되는 정도야. 조용히 하자~ 나중에.”

두 사람의 대화는 여기서 멈췄다.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에 돌아온 허영숙은 또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또 왜 이래? 그 자와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이젠 더 이상 신경쓰지 말아야지.” 허영숙은 또 다시 훌훌 털기로 했다. “흥, 내가 미쳤지.”

이렇게 하면서 한 주가 또 흘렀다. 이제 여름도 중반으로 치달아 날씨는 제법 덥다. 신주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옷매무새가 거의 반 노출이다. 이제 도쿄여자전문의대 졸업반인 허영숙은 이곳 부카케 병원 실습기간만 지나면 경성으로 귀국해야 하는 실정이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 허영숙은 씨즈코와의 우정을 위해 하루 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있었는데 요즘은 바람과 같이 나타난, 이광수 때문에 심기가 썩 편치 않다. 허영숙은 오늘도 일과에 따라 회진을 마치고 본부 사무실로 가고 있는데, 그녀의 코스가 다른 길로 변경되고 있었다.

회계과 앞을 피해서 다른 길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잘했다는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본부 사무실 앞에 당도한 허영숙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곳에 이광수가 장승처럼 서있는 게 아닌가. 이광수는 허영수를 보더니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한다.

“그간 안녕하셨지요?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를 요? 왜요?” 허영숙은 짐짓 지극히 사무적 말투로 물었다. “지난번 대납해 주신 치료비를 갚을려고요.” 정중하게 말하는 춘원의 그 특유의 까만 사슴 눈망울이 오늘은 지난번보다 더 서글서글 자극적이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나란히 정렬된 하얀 치아가 오늘은 더욱 허영숙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었다. 이렇게 깨끗한 젊은이가 지금 폐를 앓고 있다니. 또 가난하여 지병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을 하니, 허영숙의 마음은 이 청년 학생을 돕고 싶다는 측은지심으로 가득찼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광수를 바라보며 허영숙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저를 따라 오세요.” 허영숙은 이광수를 본부 사무실 건너편 의사 휴게실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채수정

 (본명 채학철 장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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