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톡] 목사 아버지와 변호사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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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이가 변호사가 된지 벌써 몇 년이 되었다. 대학에서는 사회학을 공부했고 공군장교로 군 생활을 하던 중 어느 날 생각지도 않던 변호사가 되겠다며 불쑥 말을 꺼냈다. 변호사가 되려면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한데 장교생활을 하면서 그것도 말년에 로스쿨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말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몇 달 후 아들은 로스쿨에 합격했다. 그 후 3년을 공부하고 높은 점수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아내는 큰 아이가 위로자라며 기뻐했고 나는 내 아버지 장로님께서 내게 법조인이 되기를 소망하셨던 기억이 나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아들 변호사는 원하는 로펌에서 일을 시작했고 어느새 의젓한 변호사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주민 목회를 하면서 가장 민감하고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법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다. 난민 지위를 얻는 것에서부터 때로는 불법체류자로, 결혼 이주여성들에게는 가정 폭력과 이혼, 나아가 자녀의 교육문제, 공장에서 일하면서 당하는 온갖 노동문제와 생존권 등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법적 다툼까지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법적 문제가 있다. 

어느새 아들 변호사는 나섬의 사역자가 되었다. 이주민들에게 법적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아들에게 전화를 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아들 변호사는 아무리 바쁘고 힘이 들어도 나섬과 몽골학교의 문제에 자문 변호사로 혹은 무료 법률 상담을 하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며칠 전 아내는 아들이 오래전 스페인 순례자의 길을 홀로 걸으며 기록했던 일기장을 내게 읽어주었다. 대학을 다니다 혼자 까미노 순례자의 길을 걷고 오겠다고 떠난 아들의 오래된 일기장이었다. 일기장 속에는 아들이 내게 쓴 편지가 들어있었다. 아내가 편지를 읽어주는데 자꾸만 눈물이 났다. 아들이 무언가 인생의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며 길을 걷던 그 시간 나는 아들이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역할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때는 내 나이 40대 후반이었을 게다. 그 시절 나는 일에 미쳤고 사역과 사람에 미쳤다. 그러나 정작 가족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는데 아들은 나를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멀고도 가깝다. 아니 가깝고도 멀다. 그런 아들이 나를 멀리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내 삶 속에 들어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들 옆에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아들은 내 곁에서 무심한 아버지와 동행하려 했고 오히려 나를 이해하고 스스로 어른이 되어가려 몸부림치며 순례자의 길 800km를 걷고 있었다. 그것이 무척 아팠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어릴 적 아들을 꼭 안아주지 못한 것이 내 가슴에서 좀처럼 가시지를 않는다.

아들의 일기장을 읽는다. 아내와 나는 늦은 밤 아이가 써놓은 오래전 일기장을 찾아 조용히 한 장 한 장을 읽는다. 나는 아들의 외로움과 고민을 상상하며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들의 삶을 축복한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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