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이 찬란한 가을엔 ‘손 편지’를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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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등학교 학생이던 1950년대 중후반부터 학보병으로 1년 반의 군생활을 포함하여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60년대 중반까지 10여 년의 어간에 걸쳐서 수많은 손 편지를 써서 보내고 받았었다. 그 당시에는 ‘핸드폰’은 세상에 없던 시절이었고 일반전화도 경제적인 여유가 넉넉한 가정의 전유물(專有物)이었으므로 가장 값싸고 손쉬운 통신수단은 손 편지뿐이던 때였다. 내가 서울에서 살던 곳이 1950년대의 구(舊)주소로는 성북구 “돈암동 478번지 24호”였는데 1960년대 초에 행정구역이 정리되면서 바뀐 신(新)주소는 “삼선동 1가 62”였다. 

어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내 주소를 상세히 적지만 가까운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종종 “삼선동에서, 문정일”이라고만 쓰던 버릇이 있었다. 어느 날 내가 보낸 편지가 “수취인 불명”이라는 이유로 반송되어 왔는데 놀라운 사실은 그 반송된 편지에도 내 주소를 “삼선동에서, 문정일”로 간략히 써서 보낸 편지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는 점이다. 우체부 아저씨가 ‘문정일’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 “삼선동 1가 62”라는 주소를 기억하였다는 말이니 당시 내가 얼마나 자주 손 편지를 보내고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1993년 대전엑스포 행사를 기념하여 지은 ‘엑스포아파트’에 입주하여 만 15년을 살다가 대전의 구(舊)도심인 문화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곳 문화동으로 올 때, 이웃에게 일일이 작별인사를 할 수 없어서 아파트 엘리베이터 벽에 이사하게 된 배경, 새로 이사 가는 곳, 이웃의 배려에 대한 감사 등을 적은 짧은 손 편지를 붙이고 떠나왔는데 훗날 옛 이웃들을 만날 때마다 “남기고 간 편지 감사했다”는 인사를 받으면서 퍽 흐뭇했었다. 

가을도 이제 본격적인 계절로 접어들었다. 머지않아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이 천지를 현란하게 물들이고 노란 은행잎이 아스팔트의 색깔을 바꿔놓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도시인들의 삶은 이 찬란한 가을을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있다. 주변을 살펴보시라. 아침 출근시간의 지하철의 승객들은 대부분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아니면 졸고 있다. 이들에게는 하루를 시작하는 희망찬 아침이 아니라, 또다시 고된 일상이 기다리는 숨 막히는 아침으로 보인다. 

우리도 누구나 한 사람 쯤은 그리운 대상이 있을 것이다. 이 가을엔 그리운 사람에게 손 편지를 써보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도 좋고 떨어져 살고 있는 형제자매나 일가친척도 좋다. 그러면 세속에 시달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을 것이다. 옛사람들은 벼루에 먹을 갈아서 붓으로 썼을 것이다. 먹을 가는 동안은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즐거운 시간이었으리라. 지금은 붓이 아닌들 어떠랴! 연필도 좋고 볼펜도 좋다. 그러나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찍어서 보내진 말자. 컴퓨터로 작성한 글에는 기계의 냄새가 묻어있게 마련이다. 그리운 사람에겐 기계의 냄새가 아닌 사람의 냄새를 실어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도 좋다. 글씨가 서툴러도 좋다. 그리운 사람에게 그리운 마음을 진솔하게 전하자. 코로나 전염병의 와중에 피차간의 안부도 전하고 폭염과 태풍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신 하늘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도 전하자. 풍성한 오곡백과의 결실을 허락해 주신 조물주를 향한 감격과 감동도 표현해보자. 그리고 한 번 상상해보시라. 공과금 납부 고지서나 상업 판촉 광고물로 가득 차 있던 우편함에 어느 날 생각지 못한 반가운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를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이 어떠하겠는가!

미국은 전임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나면서 후임 대통령에게 ‘손 편지’를 남기는 전통이 자리 잡았다고 한다. 1989년 레이건 대통령이 후임 부시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남긴 게 관례로 굳어졌다고 전한다.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Oval Office)’안에 있는 대통령 집무용 ‘결단의 책상(Resolute Desk)’의 서랍 속에 손 편지를 남겨놓고 떠난다고 한다. 후임자에게 성공을 바라는 덕담과 당부의 메시지를 전한다. 심지어 “표를 도둑맞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던 트럼프 대통령조차도 바이든 대통령에게 손 편지를 남겼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었다. 

해마다 찾아오고 해마다 떠나가는 가을의 뒷모습이 너무나 쓸쓸하지 않은가! 이 찬란한 가을에는 그리운 사람에게 손 편지를 쓰자. 이메일이나 휴대폰 문자가 아닌, 육성(肉聲)이 배어있는 그리운 정을 육필(肉筆)에 실어 보내자. 의미 있는 가을로 우리의 뇌리에 새겨져 오랜 세월동안 남아 있게 되리라.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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