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창] 김동길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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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감과 사랑, 그리고 옳고 바른말로 이 시대를 풍미했던 영성과 지성을 지닌 국민의 스승 김동길 박사가 별세. 많은 국민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김 박사는 1928년 평남 맹산에서 태어났다. 북한의 공산주의가 싫어 1946년 월남한 후 94년을 독신으로 보내면서 공직으로는 연세대 교수와 부총장 그리고 국회의원을 역임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직업에 대해 위키백과는 영문학자 대학교수 언론기업가 정치가 시민사회운동가 정치학자 정치평론가 시사평론가 저술가 작가 시인 수필가 문학평론가 철학자 역사가 등 다양하다.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국가 원로였다. 김 박사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자유 우파의 지도자요 언행일치하는 사상가요 실천가로서 자유민주주의 가면을 쓰고 진보를 가장한 무리들을 제외한 모든 국민의 정신적 지주였다. 언론은 그의 죽음에 대해 시신은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평생 살던 집은 이화여대에 기증했다. 실은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이 그의 누님이기도 하다. 기자가 연세대 기독학생회(SCA)에서 활동할 때 강연이 끝난 후 기자가 “김 교수님! 왜 아직도 결혼을 안하십니까?”라고 질문하면서 “항간에 소문에는 내 누님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하겠다고 하셨다면서요?” 

당시 40대의 김 교수는 껄껄 웃으면서 “거 쓸데없는 소리 말라우!” 하면서 특유의 너털웃음을 짓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만큼 김 교수 남매는 60년대에 모든 면에서 젊은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었다. 또 교수 동문 제자 친지들을 자택으로 초청해 냉면파티를 해왔던 일화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10월 유신으로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어 감방에 복역 중에도 같은 방에 수감돼 있던 학생들에게 영시 등을 가르치면서 민주주의 인격 인품 교양 등을 설파해 지금도 80 노객이 된 감방동료들이 워즈워드의 영시를 읊조릴 정도로 후진들을 사랑했었던 일화도 있다. 그는 생전에 공산사회주의와는 담을 쌓았고 특히 북한의 김가 3대세습 독재체제를 인정하고 따르는 종북좌파들에 대한 비판의 날은 정말 날카로웠으니 골수 자유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정말 김 박사는 자유인답게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고 가셨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했다. 고인에 대해서는 평생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해 오시며 우리들의 귀감이 되었고 언제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다는 사랑과 진심 의협심과 정의감을 보여주신 분이며 “사람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해 지기 마련인데 김 박사는 약자에게 다정했으며 강자의 잘못 앞에서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영원한 영성과 지성과 야성을 겸비한 나비넥타이의 멋지고 유머러스했던 한 지도자 김동길 박사를 멀리 하늘나라로 보냈다. 우리 모두 철학자 니체가 외쳤던 것처럼 “내일 죽는 것처럼 오늘을 사랑하면서 우리 인생의 큰 족적은 없어도 오직 주님을 섬기며 겸손하고 참된 여생을 보내도록 힘써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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