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16)  불우한 이웃의 벗이던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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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 ‘향린원’ 선생님 ④

인생은 연약한 생각하는 갈대

돈으로 행복의 안채 살 수 없어

고아 돌보는 것을 자기 천직으로

내 젊음 전부를 불사르던 고아원 

영혼의 화가 렘브란트가 “나는 돈도 명예도 다 소용이 없다. 오직 화가로서의 자유를 원한다”고 했듯이, 행복은 느끼고 살 수 있는 자유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은 행복을 느끼고 또 그 행복을 자기의 생활의 의미로 받아들이려는 삶에 있다고 하겠다. 부(富)한 돼지가 되기보다 가난한 소크라테스가 되어도 좋다는 체념에서, 인생은 연약한 갈대지만 생각하는 갈대란 의미로 하늘을 쳐다보면 거기 행복의 무지개가 찬란히 빛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리란 말이다.

이런 정도가 되면 비로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는 성서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교훈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세상은 고르지가 못하다는 것을 최근에 또 느껴 보았다. 어떤 부호는 정원을 기분에 맞게 고친다고 1천여만 원을 들였다는 소식을들은 그날 저녁에 사십이 가깝도록 장가를 못가고 혼자 살던 불행한 친구가 찾아왔다. 그런데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상대자를 데리고 온 것이다. 결혼식을 부탁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는 보고를 하러 온 것이었다. 그 친구 언제나 때에 절은 와이셔츠를 입고 다니더니 역시 때에 절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를 만나 지금 살림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꼭 한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 살고 있는 무허가 판자집이 석 달만 더 있다 헐렸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석 달만 벌면 다른 터로 옮길 수가 있겠는데, 판자집을 헐라는 마지막 경고장이 나왔다는 것이다.

있는 대로 저녁을 차렸더니 그릇을 깨끗이 비워 놓았다. 약간의 의류를 꾸려 주었더니 그렇게 기뻐할 수가 있으랴. 부인 될 사람이 챙겨서 머리에 이고 인사를 수없이 하고 가는 뒷모습은 흡사 한 쌍의 원앙새였다.

그 후도 가끔 찾아오는 이 친구, 꼭 그 부인과 손을 맞잡고 오는데, 어쩌면 그 남편에 또 그 색시가 격에 맞는구나 느껴질 때에 행복이란 저런 데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의 정문(正門)은 살 수 있어도 행복의 안채는 살 수 없는 것이다.

명예는 행복의 기치(旗幟)이지 내용은 아니다. 지위는 행복의 신기루(蜃氣樓)이지 보좌는 아니다.

행복이란 다른 사람을 믿는 나의 마음과 나를 믿어 주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의지에 연결될 때에 우리 앞에 나타나는 찬란한 무지개이다. 인생은 그 무지개를 바라보며 생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무지개는 보는 것이지 가지는 것이 아니다.

‘고향으로 오라’

향린원에서의 그의 생활에 대해서는 많은 에피소드가 전해지지 않는다. 원장 사모님이 억센 기질의 관북 지방 여성이라, 소녀처럼 얌전했던 광은 선생은 퍽 행동거지에 조심스러웠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때 함께 젊은 선생님으로 일하시던 소설가 이종환 선생이 많은 에피소드를 알고 계실 터인데, 그분마저 가신 이 마당에 그 당시의 황광은 목사의 행적에 대해서는 더 알 길이 없다.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 한 토막이 전해진다.

일제 말기의 어느 날 밤이었다. 광은은 친구 종환과 또 다른 친구 김 모와 그 김 모가 가까이 지내고 있던 엔도(엔도)라는 일본 여자와 넷이서 자하문 근방을 산책하게 되었다. 그 일본 여자는 그 당시 정무총감인 엔도 사령관의 딸이라 기세가 당당했다. 그러나 자기의 신분을 과시하지 않고 일행과 어울려 산책에 나선 참이었다.

그 당시 자하문 쪽에는 일본의 기마 헌병이 순찰하고 있었고, 밤이 늦으면 일반인의 통행을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십 고개 문턱에 오른 발랄한 그들은 그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큰 목소리로 노래까지 부르며 자하문 고개턱에 이르렀을 때 아니나 다르랴, 일본 헌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헌병 앞에 불려가기가 무섭게 ‘철썩’ 소리가 나더니, 종환의 뺨에 헌병의 손바닥이 날았다.

헌병은 뒤이어 광은의 뺨을 때리려 했다. 그때 광은은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죠또 맛떼(잠깐만)”라고 일본어로 말했다.

어안이 벙벙해 서 있는 헌병 앞에서 광은은 끼고 있던 안경을 유유히 벗었다. 그리고 한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헌병 앞에 뺨을 내밀며, “도우조(어서 때리시오)”했다. 헌병은 어이없이 껄껄 웃을 뿐 때리려 하지 않았다.

그때 엔도 총감의 딸이 나서며 자기 신분을 밝히자 헌병은 “핫!”하고 부동자세를 취하더니, 자기의 잘못을 정중하게 사과했다고 한다.

이런 에피소드를 남기면서 광은은 계속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는 고아들을 돌보는 것을 자기의 천직으로 알았다. 때문에 뒷날 교목으로 또는 목회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언젠가 기회만 오면 다시 고아들을 돌보기를 희망했다.

그가 뒷날 미완성의 글로 남긴 ‘고향으로 오라’라는 짧은 글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글은 영락 보린원에서 집회를 인도한 뒤에 적은 글이다. 우리는 그 짧은 미완성의 메모에서 황광은 목사의 신념과 이상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이라니까 평안북도 용천 고을이라는 내 고향에 왔다는 어감이지만, 실은 그보다도 내 젊음의 전부를 불사르던 고아원이란 고향에 돌아온 이야기다.

얼마전 유 원장이 오래 전부터의 숙제이니 정초에 한 번 와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주지 않겠느냐는 부탁을, 불우한 아동에 관한 한 거절할 수 없다는 내 신조로 우선 대답하고 보았던 것인데, 이렇게 주일을 함께 숙식을 하며 지낼 줄은 몰랐다. 그렇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잃었던 고향을 다시 찾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19세의 까까머리 총각으로 선생도 아니요, 그렇다고 학생도 아닌 고아원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 소위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때 징병기피를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의심을 받으면서 문을 두드렸던 삼각산 밑 향린원의 생활이 해방이 되기까지 4년간 계속 살았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복숭아 꽃이 만발한 삼각산 계곡의 구슬같은 물소리를 들으며 돌아 올라가 형제봉 밑에 제단처럼 들어 올려놓은 장난감처럼 아름다운 돌집 그 마당에서 제멋대로 뛰노는 200명의 구릿빛 얼굴을 대하던 나는 오늘 후암동 뒤 언덕에 현대식 주택에 둘러싸인 영락 보린원의 현관을 들어설 때의 감회는 형언할 수 없었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전 장신대 학장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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