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이승만의 성령세례와 1907년 평양 성령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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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적 주소가 다른 아볼로와 바울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확실히 아볼로와 구분된다.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아볼로가 고린도로 갔을 때, 바울이 다시 에베소로 왔다. 그곳 교회를 살펴보던 바울이 질문했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바울이 들은 대답은 “우리는 성령세례가 있음도 듣지 못했다. 우리는 요한의 세례만 알 뿐이다”라는 것이었다.

예수는 성령세례와 물세례를 분명히 구별하셨다. 물세례는 달리 표현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요,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사도들조차도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나서기 전에 반드시 기다려야 할 것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 믿는 우리는 스스로 질문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아볼로’ 과인가, ‘바울’ 과인가?”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고 구원을 받았고, 곧 직가에서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 성령세례를 받았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구원과 성령세례가 동시에 임했다. 마치 고넬료와 그의 가정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때 성령이 임했고 이에 따라 베드로가 물세례를 베풀었던 것과 같다. 동시적이었다.

2. 1907년 평양 성령강림 사건보다 앞선 이승만의 성령세례

한국교회사의 대가 민경배 박사는 한국교회에 구원이 임한 때와 성령세례가 임한 때를 구분하고 있다. 1885년의 한국교회는 개인 구원의 경건주의 교회요, 1895년 한국교회는 애국 충군의 교회로서 정치적 관심이 신앙적 관심을 압도했다. 그 선후 질서를 분명히 한 계기가 바로 1907년 평양에 떨어진 성령의 불이었다. 성령세례를 받은 한국교회는 비로소 신앙의 밑바탕이 된 애국의 공동체적 교회로 정립되었다.

이승만의 성령세례는 1899년 한성감옥에서 구원과 동시에 임한 것으로서 1907년 평양 성령강림 사건을 거의 10년을 앞서고 있다. 한국교회가 1895년의 애국충군의 교회로서, 이승만의 표현에 의하면, ‘조급한 정치 우선주의’나 혹은 정반대의 ‘좁다란 복음 이기주의’의 특징을 표출하던 때였다. 그러나 1907년 한국교회가 성령강림 사건을 계기로 정립하게 된 신앙의 교화가 나라의 질서와 근간을 이룬다는 사실을 성령세례를 받은 이승만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이승만에게 임한 성령과 1907년 한국교회에 임한 성령이 같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승만은 성령세례에서도 기독교입국론의 근대한국의 선구자요 선각자였다.

“그러나 정치는 항상 교회 본의로서 딸려 나는 고로 교회에서 감화한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정치의 근본이 스스로 바로 잡히나니 이러므로 교화로서 나라를 변혁하는 것이 제일 순편하고 순리한 연유니라. 이것을 생각지 않고 다만 정치만 고치고자 하면 정치를 바로 잡을 만한 사람도 없으려니와 설령 우연히 바로 잡는다 할지라도 썩은 백성 위에 맑은 정부가 어찌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반드시 백성을 감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한 후에야 정부가 스스로 맑아질지니 이 어찌 교회가 정부의 근원이 아니리오.”

류금주 목사

<전 서울장신 교수·현 청교도신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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