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목사 청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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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에 예정된 공동의회는 연기해 5월 19일에 다시 공고하고 5월 26일에 열기로 했다. 노회가 실시한 계 목사의 목사고시 일정을 5월 14일 2시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5월 26일 공동의회가 열렸다. 은혜 노회에서는 임시의장으로 Billy Newton 목사가 왔다. 그분의 개회선언 후 먼저 청빙 위원장의 청빙 경과보고를 들은 다음 새 목사의 연봉에 대한 재정 장로의 설명이 있었다. 계 목사가 선정된 경유와 위 연봉 조건을 들은 후 목사의 청빙에 대한 무기명 투표가 있었다. 결과는 재적 140명 중 찬성 133, 반대 2, 기권 5표로 계 목사가 압도적인 지지로 담임 목사로 확인되자 Newton 목사가 이를 선포하고 모든 교인이 박수로 확인했다. 이어서 청빙서 서명은 당회원 전원이 교인을 대표해 서명하기로 하고 7월 16일 Athens, TX에서 열리는 노회에 참석해서 새 목사를 소개할 한인 대표(Commissioner)는 당회에서 선임하도록 하자고 결의한 뒤 공동의회는 마쳤다. 드디어 노회의 사무적이고 합리적인 채용절차와 한인 교회의 ‘은혜스럽게’의 기 싸움은 끝났다. 

7월 28일 계 목사는 드디어 8개월 만에 댈러스 한인 장로교회의 제2대 목사로 위임을 받게 되었다. 그의 위임 예배는 10월 첫 주 교회 창립 10주년 기념 예배를 겸해서 최창욱 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갖기로 했다. 목사 사모 계은덕(Dr. Kay)은 남가주대학(USC)의 교수로 있다가 댈러스에 있는 텍사스 대학 건강과학센터(UT Health Science Center at Dallas)의 연구교수로 일하게 되었는데 이는 미국 교회에서는 사모의 직업은 한국과는 달라서 자유로웠다. 즉, 목사가 교회와의 계약만 지키면 되었고 계약이 불만족스러우면 목사는 떠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사모가 심방을 다니지 않고 부직을 가지면 한국 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조항은 계약서에는 없었다. 계약을 앞세우면 목사는 피고용자가 되어 권위가 추락하고 ‘은혜스럽게’를 앞세우면 혹 질 낮은 목사를 모실 때 그의 권위주의와 삯꾼 목사의 전횡을 막을 길이 없다. 어떻든 교회가 미국 노회에 속한 이상 이제는 노회 법에 따라야 했다. 

계지영 목사는 한국 장로교 신학대학 제9대 학장이었던 계일승 목사의 아들이다. 서울 문리대에서 사학과를 마치고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UCLA 대학원에서 동양사 연구, 남가주의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유능한 학자이며 목사였다. 

나는 계 목사님이 취임할 때만 보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한남대학과의 계약관계 때문이었다. 그동안 하워드패인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가정에 얽매어 충성스러운 종노릇을 못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께 칭찬받을 일을 못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주는 나를 버리지 않고 돌보셨다. 우리 부부는 4남매를 다 불러 미국에 모아 놓고 대책 없이 그곳을 떠났는데 주께서 그들을 돌봐주신 것이다. 큰딸은 수학과 대학원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고 있었으면서 수학과 과장의 배려로 학부 학생까지 가르쳐서 생활비 보조를 받고 있었다. 큰애는 여러 교인의 주선으로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보스턴대(BU)에서 RA(연구조교)로 뽑혀 그해 8월 중순에 떠났으며 둘째는 계은덕 사모의 실험실에서 연봉을 받고 함께 논문을 써서 발표하길 거의 2년을 했다. 여러 대학에 장학금을 신청했지만 거절된 것은, 더 나은 대학, 하버드에서 장학금으로 대학을 마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그의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은 지금도 내가 따를 수 없다, 막내는 198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스틴의 텍사스 대학(UTA)의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내가 그들이 대학에 가는 일에 조금도 도움을 준 일이 없다. 나같이 불성실한 종을 하나님께서는 돌보신 것이다. 내가 자녀들을 하나님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맡아 길러 주셨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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