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부흥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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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으로 귀환하기 전, 또 새 목사를 모시기 전 김준곤 목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한 일이 있다. 시내에 ‘쉐라톤 호텔(Sheraton Inn)’을 경영하고 있던 우리 교회 김 장로는 CCC의 미주지역 연락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는 김 목사가 댈러스를 방문하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에 댈러스 지역에서 교회 연합부흥회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댈러스 한인교회 목사들을 호텔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연합 집회를 제안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실망스럽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김 목사는 성령파 목사가 아니어서 헌금이 경비를 부담할 만큼 나오지 않는다는 간단한 결론이었다. 결국, 우리 교회가 그 일을 맡기로 했다. 우리 교회는 그 때가 창립 10주년이었기 때문에 모든 행사는 1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집회는 「댈러스 한인 장로교회 10주년 기념전도대회라고 이름 붙이기로 했다. 우리는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는 일이면 우선 그것부터 할 생각이었다. 

김 목사는 하얀 양복을 입고 하나님의 사자라고 으스대는 부흥사가 아니었다. 자기처럼 믿으면 병이 낫고, 필요할 때 돈이 꼭 필요한 만큼 생긴다고 기복신앙을 강조하거나 신유(神癒)의 은사를 베푸는 목사도 아니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하나님께 붙들린 바 된 사람 같은 느낌을 주는 분이었다.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고 싶은데 시간이 너무 부족해 안타까워하는 분 같았다. 여러분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 생명의 피를 제사 술처럼 따라 부어도 기뻐하겠다(빌 2:17)는 바울의 고백이 그의 삶의 모습에도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간증은 가슴을 뜨겁게 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김 목사가 EXPLO ’74, 민족 복음화 운동을 계획하면서 너무나 많은 장벽과 사탄의 방해에 부딪힌 걸 이겨낸 지도자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당시 대학에서 CCC 지도교수였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 간사들을 서울로 불러 교회로 인도한 뒤 이 대회에 대해 염려되는 일, 안되리라 생각하는 일, 사탄의 방해 등 생각나는 대로 말하라고 하고 수석 간사에게 그것을 모두 받아쓰게 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부정적인 제목 75가지를 두고 간사들과 밤새워 기도하고 그들에게 주를 믿고 확신을 하게 한 것도 알고 있다.

또 한 가지는 행사의 둘째 날인 8월 15일, 해방 기념 예배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비가 오기 시작한 일이었다. 기자들은 비가 멎을 기세가 없이 점차 심해지자 저녁 집회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성화였다. 130만 명이 넘는 청중이 모이는 대집회였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결단이 필요한 때였다. 그는 집회를 연기하지 않았다. 8시 저녁 집회 시간이 되어도 비가 멎지 않았다. 그런데 기적적인 것은 우산을 받쳐 든 성도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집회장을 메울 뿐 아니라 집회에 열기가 더해가자 한 사람 한 사람씩 우산까지 접고 빗물이 고인 바닥에 성도들이 그냥 앉아 말씀을 경청한 일이다. 그들은 퇴장할 때도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쓰레기도 남기지 않고 주워 돌아갔다. 이것이 세상 사람을 감동케 해 1970년도 전도폭발이 일어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성령에 붙잡힌 자, 기도의 사람, 김중곤 목사를 통해 10주년 기념 전도회에서 깊은 은혜의 체험을 했으며 우리 교회의 집회에 참석한 다른 교회 성도들에게도 큰 은혜를 끼쳤다. 연합 부흥 집회가 경비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 하는 것에 의해 그 성사 여부가 결정된다면 그것을 영적인 집회라고 부를 수는 없다. 집회를 통해 경비를 모으는데 온통 신경을 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말했던 갈라디아서의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는 그때 풍족히 경비를 쓰고 교회도 성령의 불길로 더욱 뜨거워졌었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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