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종교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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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과 야만적인 행위는 역사에서 수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 광신도들의 테러행위가 그렇고 중세교회의 십자군전쟁이 그러했으며 심지어는 종교개혁시기와 그 이후에 유럽과 북미대륙에서 행해진 마녀재판이 그러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확립된 현대사회에서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슬람의 테러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임은 분명하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과학자들이 전투적인 무신론을 주장하는 이유도, 역사적으로 종교적 신념이 폭력과 증오를 정당화하고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에서도 종교적 열심에 의해 잔인한 폭력과 야만적인 행위가 자행되어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시기의 마녀재판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마녀재판은 중세에도 있기는 했지만 가장 맹렬하게 이뤄진 것은 1570년부터 1630년에 걸쳐 다양한 개신교 교파들과 가톨릭교회간에 교리적 이념논쟁이 격화되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종교재판의 형식으로 이뤄진 마녀사냥은 16세기에 남부독일의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스코틀랜드에서 극심하게 행해졌고, 북미대륙에서도 메사추세츠주 세일럼에서 1692년에 청교도들에 의한 마녀재판으로 20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처형되는 일이 벌어졌다. 

잔인한 고문과 화형이라는 극악한 처형으로 점철된 마녀재판은 극심한 여성차별과 악마와 마법을 믿는 비합리주의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전근대적 현상이기는 하지만, 그 배경에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집단적인 광기와 편견, 혐오에 사로잡힐 때 저주와 폭력조차 정당화될 수 있다는 엄정한 현실이 숨어 있다.

사랑과 은혜를 가르치는 교회에서 어떻게 이런 증오와 폭력이 일어날 수 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동기가 아무리 선하고 순수할지라도 독선과 자기 중심성이 자리하는 순간부터 모든 종교적 이념은 증오와 폭력으로 치닫게 됨을 우리는 역사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어떤 가톨릭과 성공회 신부들이 대통령 전용기가 추락하기를 기원한다는 저주성 그림과 문구를 SNS계정에 공개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언론기사를 보면서 이슬람 테러나 마녀재판과 같이 종교가 증오와 폭력을 정당화하는 또 하나의 사례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종교인으로서 개인의 영달보다는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통해서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제들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름대로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회관을 갖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 어떤 정의의 이름으로도 자신의 반대파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것도 또한 분명하다. 

종교의 타락은 바리새인처럼 가장 고상하고 순수하며 바르게 살려고 하는 종교적인 열정을 가진 인물에 의해 이뤄진다. 바리새적 신앙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분노하고 도덕주의적이다. 바리새주의는 자신의 선함으로 노력을 구원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한다. 그런데 사실은 자신도 똑같은 죄를 범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내로남불’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 죄인이고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에 기초한 참된 기독교 정신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바리새주의의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김완진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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