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배위량 순례단의 역사(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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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에서 안동까지(2)

필자는 그동안 150여 회에 걸쳐 배위량에 관한 글을 한국장로신문에 게재(揭載)하고 있다. 배위량이 1893년 4월 18일에서 5월 20일까지 순회전도 여행한 부산 동래→범어사 인근→물금→밀양(유천)→청도→대구→동명→구미 해평→낙동→상주→용궁→풍산→안동→의성→신녕→영천→경주→울산→부산 동래 구간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개 구간으로 글을 나누어 게재할 구상을 했다. 

1. 부산 동래에서 대구까지 

2. 대구에서 상주까지

3. 상주에서 안동까지

4. 안동에서 경주까지

5. 경주에서 부산까지 

5개 구간으로 나누어 배위량의 전도 여행과 관련해 교회사 학자들이나, 선교학자들이 쓴 논문이나 문헌들과 논쟁을 해 때로는 학자들의 주장에 반기를 들고 잘못 연구되거나 이해되는 것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정리하기도 했고 순회전도 여행길을 직접 답사하면서 배위량의 일기에 나타나는 애매한 장소와 일정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정리하기도 했다. 

그중에 기존 학자들의 주장과 다르게 필자가 새롭게 정리한 중요한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배위량이 밀양 상동면 옥산리에서 1893년 4월 20일밤을 숙박했다는 주장에 대해 1893년 4월 20일 밤을 청도군 청도읍 초현리에서 숙박한 것으로 정리했다.

2. 배위량이 순회 전도 여행시에 여관에서 잠을 잤다고 거의 모든 학자들의 주장을 반대하고 주막에서 잠을 잤다는 것을 정리했다. 

3. 배위량이 청도에서 잠을 잔 곳을 배위량의 일기를 따라 모든 학자는 ‘안세부리’라는 지명으로 언급했다. 그런데, 청도 팔조령 은근에 ‘안세부리’란 지명은 없어 청도 군청, 이서면사무소와 도사관 등지로 가서 문헌을 탐독하고 이서면 현장을 탐방하고 사람을 만나 많은 대화를 통해 ‘안세부리’는 이서면 신촌리 ‘안새월’ 마을임을 논증했다. 

4. 배위량이 동명에서 해평으로 가는 동안에 왜관과 성주를 들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배위량이 동명에서 장천을 거쳐 해평으로 간 것을 밝혔다. 

5. 배위량이 낙동에서 상주로 가는 동안 김서방을 만났는데, 그 김서방의 집이 지금까지는 낙동면 화산리로 알려졌다. 그것을 필자는 현장을 방문해 화산리가 아니라, 낙동면 신상리임을 밝혔다. 

이러한 필자의 정리는 필자가 학자들의 논문이나, 문헌을 보면서 순회 전도 여행지의 현장을 순례하면서 관찰하고 습득한 지식으로 정리해 주장했던 것들이었다. 필자가 책에서 공부한 내용과 현장에서 습득한 지식을 정리해 현장 상황에 맞추고자 노력을 했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을 정리해 체계화해 정리한 논문이 KCI등재학술지에 게재된 것도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의 주장을 담은 논문이 한국교회사 학자들이나, 선교학자들도 인정하는 학문적인 글이라는 객관적인 평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적인 여건상 학문적인 논증까지는 아직 못했지만, 현장에서 습득한 지식을 배위량의 일기나 배위량에 관한 논문과 연구서와 비교하고 분석해 한국장로신문에 게재한 것도 있다. 

지금까지 배위량의 순회 전도 여행길과 관련되어 학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매우 중요한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용궁에서 안동으로 가는 동안의 노정(路程)

2. 안동에서의 일

3. 안동에서 의성으로 갔던 노정(路程) 문제 

4. 영천에서의 일

5. 경주에서 울산을 거쳐 부산으로 갔던 노정(路程) 문제

앞으로 원래의 계획으로 잡았던 계획을 어떻게 쓰고자 진작부터 머리에 구성은 했지만, 2023년 3월부터는 다른 필진에게 지면을 넘겨야 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이런 일을 언급만 하고 말아야 할지 아니면 다섯 구간을 2개월 안에 다 다루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니, 한 구간이라도 좀 더 책임감있게 글을 쓰는 것이 좋을지 결정해야 한다. 아직 그것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만간 결정해야 하고 글 마무리를 해야 된다. 한 구간이라도 좀 책임감 있는 글을 쓰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책임 회피처럼 보이더라도 전체를 개괄적으로 다루는 것이 좋을지,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게 될 것 같다. 

이 글을 쓴 후부터 항상 부딪치는 문제는 배위량이 동래에서 출발한 후 어떤 길로 대구까지 갔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길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어떤 형태로든 길은 다 변했기에 순례 노정을 찾고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 더욱이 배위량도 자신이 여행한 날 그가 어느 노선으로 여행했는지는 그의 일기에 기록을 정확하게 하지 않아 확인하기가 어렵다. 배위량에게 순례전도여행길이 첫 길이었기에 그는 여행 안내인으로 고용한 마부들이 이끄는 대로 길을 따라 가면서 마부들로부터, 오가다 만난 여행객들로부터 얻은 지식으로 자신의 여행에 관한 글을 썼을 것이다. 

상주에서 안동을 향해 여행을 시작한 배위량은 첫날 밤을 예천 용궁면 소재지인 용궁에서 숙박했다. 배위량이 용궁 어디에서 잠을 잤는지에 대해 그가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느 곳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다. 예천군에 소속된 면으로 예천읍 서쪽에 있는 용궁면(龍宮面)은 예부터 존재한 행정구역이지만, 낙동강 상류와 내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용궁은 읍부리, 금남리 등 11개 리(里)로 이루어져 있고 낙동강 상류와 내성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용궁면은 예천군 풍양면, 지보면 개포면 그리고 문경군 영순면과 산양면과 접해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의 중요성으로 옛날에는 용궁군(龍宮郡)의 중심지였다. 용궁면 소재지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회룡포(回龍浦)가 관광지로 알려지기 전에는 ‘의성포(義城浦)’로 불렸다. 그런데 충효에 의(義)지와 내성천의 성(城)자가 합쳐져 이루어진 의성포라 불렸는데, 회룡포가 근래에 들어 매스 미디어(the mass media) 영향으로 “대한민국 관광명소 10위권으로 진입하면서 인근의 의성군과 혼돈하게 되는 민원에 시달리던 당시 용궁면 장병국 부면장께서 뿅뿅다리 건너편 회룡마을의 부락명에 착안해 1995년 군에 명칭 변경을 제안한 게 채택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회룡포가 오래전에는 세간에서 ‘시물건네’로 불렸는데, 그것은 신라 망국의 태자인 “마의태자께서 서라벌을 떠나 금강산으로 입적할제 이곳을 지나면서 ‘한 내를 건너는데 시번 발을 적시는구나’ 라며 한탄을 하신 데서 유래해 ‘시물건네’ 였다”. 회룡포는 대한민국 사진작가들이 좋아하는 곳 중의 한 장소이다. 회룡포 마을로 가기 위해 뿅뿅다리를 건너가는 것도 좋지만, 회룡포 마을 건너편 산정 위에서 회룡포 마을을 조망하는 것도 정말 좋다. 전망대에 올라가서 회룡포 마을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중 명작들이 많이 나온다. 내성천의 맑은 물줄기를 따라 은모래 물결을 바탕으로 시원한 내성천 물줄기가 느릿느릿 흘러 가는 어귀에 회룡포 마을이 한가롭게 얹혀있어 그 마을을 건너편 산정에 앉아 바라보노라면 상주에서 용궁까지 도로 순례하느라 몸도 마음도 지친 순례객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는 이상한 힘이 있다. 

한참 동안 회룡포 마을의 모습을 멍하게 쳐다보다 어슬렁거리며 산을 내려와 제1 뿅뿅다리를 건너 회룡포 마을로 들어가면 잘 정비된 마을길과 눈에 익은 시골 마을이 눈에 들어오고 아이들 손을 잡고 마을을 돌아보는 젊은 여행객들을 만나게 된다. 이렇게 하루가 익어가는 마을을 담고 있는 예천용궁은 역사가 많은 고장이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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