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은혜의 체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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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 결혼을 마쳤더니 큰딸에게서 편지가 왔다. “…김○○ 씨가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제가 여기 있는 동안 먼저 사귀어볼 의사를 표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대답은 안 했지만 몇 달 동안 사귀어보고 싶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상대편 부모님을 만나 뵙고 싶으시면 한가하실 때 한번 만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경사가 겹치는 것인가 하고 어리둥절했다. 

딸은 대전여고를 졸업하고 바로 미국에 와서 한 학기 미국 고등학교를 마치고 내가 다니던 수학과로 들어왔다. 아버지 때문에 등록금은 면제였다. 그녀의 선택은 수학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일방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미술을 전공하길 원했었다. 그러나 미술엔 장학금을 받을 수 없었다. 그녀가 끝까지 수학을 못 하겠다고 우겼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한다. 아마 그녀는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생각하고 내 생각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나는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그녀의 졸업식은 1984년 5월 12일이었는데 우리 부부는 한국에 나와 있을 때였다. 한국에서 그 애가 고교 졸업 때는 내가 학위과정이어서 가보지 못했고 또 미국에서 졸업할 때는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참석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어린 동생의 축하로 씩씩하게 졸업했다. 그런데 나는 또 대학원도 수학과로 가라고 권했다. 그때도 순종했고 그해 9월부터 장학금을 받게 되었으며 학부 학생 한반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그때부터 꾸준히 TA(Teaching Assistant)로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TA로 있는 것이 크게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그녀는 한 학기가 끝났는데 수강한 학생들이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자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영어가 충분히 내용을 잘 설명하지 못해 그리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미국에 있던 다음 해도 수학과 대학원 조교를 계속했고 두 남동생이 3월에 미국에 들어오자 힘을 얻는 것 같았다. 또 교회에서도 중고등부 교사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4남매를 다 미국으로 불러 들여놓고 1985년 8월에 또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치 숨바꼭질처럼 애들이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동안에는 우리는 미국에 있었고 이제 그들이 미국에 돌아오니 우리는 또 한국으로 와서 헤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미국에 있는 동안에는 애들 교육과 생활비를 한국에 보내고 있었는데 이제는 여기서 그들 생활비를 미국으로 보내야 할 형편이 되었다. 다행히 큰애는 8월 보스턴으로 떠났지만 둘째는 아직 무직이었고 막내는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다. 그들은 Singing Oak 아파트에서 두 차를 가지고 지내고 있었다. 큰딸은 그래도 장녀이고 더 오래 미국에 있었다는 것으로 적지 않은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1985년 9월 22일 달라스 한인장로교회에서는 창립 10주년 행사의 하나로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기로 결의하고 찬송가 경연대회, 퀴즈대회, 성경 암송대회를 열어 시상하기로 했다. 그런데 내 큰딸은 성경퀴즈대회에 청년부 대표로 나가 1등을 했다. 이것을 보고 교회의 목사 사모는 신학교를 가면 어떻겠냐고 말했던 것 같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장학금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신학교에서 미술 아닌 상담학 전공으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녀가 자기 앞날을 위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인 것 같다. 수학과 TA를 그만둔 것도 그해 말이었다. 당시 그녀 편지에는 프린스턴 신학교에 장학금 신청을 했다고 말하면서 추천인 명단을 보내 왔는데 거기에는 수학과 주임 교수 Dr. Allen의 이름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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