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살인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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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나온 김훈의 소설 『하얼빈』을 읽다가 잠시 당혹스러웠다. 책에 표기된 가톨릭의 ‘제5계명’ 때문이었다.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해 그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안중근의 고향 황해도 청계동에 퍼지고 이미 안중근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평양으로 해서 만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청계동 성당의 빌렘 신부는 주일 미사를 앞두고 고뇌한다. 신부는 자신이 세례를 주었고 신심이 두터웠던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기 전 사제관에서 그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소설은 빌렘 신부의 주일 미사 강론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제5계로 살인하지 말라고 석판에 손수 쓰셨다.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므로 살인은 용서받을 수 없고 사하여 질 수 없는 대죄이다. 내가 안중근에게 어렸을 적에 세례 주어서 하느님의 자식으로 거듭나게 하였으나 안중근이 총기로 사람을 죽였으니 어찌 하느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겠는가…”

장기간에 걸쳐 역사적 사실을 추적하며 심혈을 기울여 써낸 소설에서 신부는 안 의사의 거사를 하느님을 배반하고 교회를 배반한 중한 죄로 고하면서도 수개월 후 안중근이 처형되기 직전 여순감옥으로 그를 찾아가 그에게 고해성사를 베푼다. 민족의 영웅의 최후를 소설에서 보며 감동에 잠기다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이 어찌 소설에서 제5계명으로 표기되었나?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목사인 아들에게 전화를 해서 설명을 들었다. 가톨릭에서는 십계명의 배열을 개신교계와 다르게 해서 살인을 금하는 계율이 다섯 번째로 올라와 있다는 것이다. 

신·구교, 유대교, 그리고 개신교 일부(루터교)에서 십계명을 더러 다르게 배열하는데, 개신교 성서에서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라는 1-4계명을 가톨릭 10계명은 셋으로 모으고 ‘부모를 공경하라’를 제4계명으로, ‘살인하지 마라’를 5계명으로 한다. 그리고 개신교의 제10계명 즉 남의 소유와 아내 등을 탐하지 말 것을 둘로 나누어 제9, 10계명으로 한다. 가톨릭도 초기에는 개신교와 같은 식으로 분류했었는데 5세기 성 아우구스티노가 오늘과 같이 정리했다고 한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후 114년이 지난 오늘 이 땅에서는 이 사건을 다룬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와 연극이 높은 인기리에 상연되고 있다. 한국인이면 누구도 이토와 일본제국주의의 죄악을 의심하지 않고 안중근을 민족의 영웅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안중근은 일본인이 재판하는 법정에서 자신이 조선의병대 참모중장으로서 조선과 일본의 전쟁에서 적 수괴를 사살하고 포로가 되었음을 주장했다. 소설가 김훈은 안 의사가 거사를 위해 동포청년 우덕순과 함께 준비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치밀하게 따라간다. 그가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결심을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잊어버리는데 대해 작가는 문학적 상상을 펴는 대신에 오직 노일전쟁의 살육과 조선침략의 만행으로부터 이토의 죄를 고발한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열가지 계명을 내리신 이래 인간은 꾸준히 이를 어기는 역사를 써내려 오고 있다. 국가간 전쟁은 인류문명에서 살인이 정당화되는 영역이다. 오늘날 세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정의로운 힘이 독재자 푸틴을 제거해 주기를 바란다. 안중근 의사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계명은 악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전쟁으로부터 그를 떼어놓지 못했다. 자신의 총성과 함께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김명식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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