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1)  한국교회의 첫 선교사 이기풍 목사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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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명 알림으로 기독교 향한 기대 커져

윤함애 사모, 기도로 오랜 병치레 치유받음 

그곳에 세워진 교회가 13곳이었다. 각 교회가 세워지게 된 배경에는 이기풍 목사에게 복음을 듣고 동역하게 된 이들이 있었다. 제주는 선교사들이 퀠파트(Quelpart=반란) 라 불렀다. 인구 10여 만이 사는 제주도는 전주, 남원, 나주로 이어진 전라도의 행정 중심지 4개의 목(牧) 가운데 하나로 정치인의 유배지였고 인재를 배출했다. 또 육지와 거리가 있어서 언어, 풍습이 한국 민속의 보고였다. 그래서 복음 전파가 어려웠다.

이기풍 목사는 인간관계를 잘해서 주변의 토착 신앙인들과 협력했다. 이기풍 목사가 오기 전 토착 기독교인들이 이기풍 목사가 온 직후 이기풍 목사의 선교를 열심히 함께했다. 이승훈 장로도 유배되었을 때 그에게서 신앙적 용기를 받았다. 이들은 제주민에게 근대문명을 알렸고 제주민들은 이들의 영향으로 근대문명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한 기대도 커졌다. 

이기풍 목사는 선교사뿐 아니라 한국의 유력 인사와 교류함으로 제주도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신축 교안(辛丑 敎案)’ 후 배척받던 기독교가 제주에 뿌리를 내렸다. 천주교에서는 ‘신축 교안’이라 하고 제주민은 ‘이재수(李在守)의 난(亂)’이라 했다. 이는 천주교와 제주민 간의 반목갈등이었다. 천주교인과 제주민이 많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해서 제주민과 기독교 간에 반목했다.

아직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팽배한 제주도에서 선교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이기풍 목사는 좌절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여러 교회를 세웠다. 

1908년 조천 장로교회의 지금 위치는 1914년 지적도에 이기풍의 대지였다. 천 아나 여인이 1908년 이기풍 목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1909년에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헌납해 조천 교회가 시작되었다. 

자식을 못 낳아 두 번 소박을 당해 궂은 일을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던 중 57세에 이기풍 목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었다. 조천을 떠나 성읍에 와서 다시 자기 집을 바쳤는데 이곳이 성읍 교회의 기틀이 되었다. 또 법환교회의 개척에도 참여했다. 1921년에 조천으로 돌아와서 교회 일을 하다가 1930년에 79세로 소천했다.

이기풍 목사에게 가장 큰 후원자는 그의 아내 윤함애 선교사였다. 윤함애는 황해도 중골 윤 진사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문밖 출입이 어려웠고, 이를 불쌍히 여긴 부친은 딸이지만 특별히 글을 가르쳐 책을 읽었다. 윤함애가 15살 무렵 말라리아에 걸렸는데 당시 치료방법이 없어 오랜 병치레를 했고 18살에는 뼈와 가죽만 남고 움직일 수도 없게 되어 죽는 날만 기다렸다. 

그때 그 지역에서 전도하던 김채봉(언더우드의 조사)이 윤함애에게 와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한 마디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떤 빛이 온몸을 비추고 방 밖으로 나가는 꿈을 꾼 뒤 굳었던 몸이 풀리며 시체와 같던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후 음식도 먹고 힘을 얻어 병이 나았다. 윤함애는 마음의 평안을 얻어 주님의 구원에 감격했다. 윤함애는 자기를 살려주신 예수를 더 깊이 알고 싶어 한 달에 한 번 안악에 전도하러 오는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서 성경공부를 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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