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믿음으로 한국 땅에 뛰어든 배위량 목사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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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량 순례단의 역사(31)

상주에서 안동까지(6)

그런데 만약 배위량이 용궁에서 1893년 5월 1일에 도착해 3일까지 용궁에 머물렀던 이유는 비가 왔기 때문이었다. 5월 1일 밤에 용궁에 도착했는데 그날 밤에 밤새도록 비가 왔고 2일 날에도 아마 하루 종일 비가 와서 풍산을 향해 출발하지 못했던 것 같다. 3일 오전에도 비가 와서 용궁의 주막에서 정오까지 배위량은 “공부하고 번역하면서 보냈다. 비가 멈추자 즉시 출발하였다.” 배위량이 용궁에서 출발해 개포를 거쳐 예천읍 가까이 갔지만, 예천읍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예천 읍내를 왼편에 두고 지나왔다”고 쓴 그의 일기에서 그가 왜 예천읍내로 들어가지 않고 왼편에 두고 지나갔는지를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1. 상주와 용궁에서 계획과 다르게 오래 머물렀다

배위량은 예기치 않게 상주에 4월 27일에서 5월 1일까지 머물렀다. 그 이유는 함께 동래에서 출발했던 마부 한 명이 병이 들어 낙동에 남겨두고 왔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상주에 도착해서 또 다른 마부 한 명과 그들과 함께 여행을 했던 소년이 병이 들었다. 병이 든 상태로 여행을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위험한 일이다. 마부는 짐을 싣는 말을 몰고 온 사람임과 동시에 그들의 말은 배위량이 한 달여 동안의 여행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가져온 온갖 짐을 싣는 짐승이다. 그리고 배위량과 그와 함께 온 다른 사람들은 그 길이 초행길이라 길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순회전도 여행을 출발했다. 외지에서의 여행은 많은 위험성이 따른다. 그래서 길 안내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무슨 여행이든 타지에서의 여행은 늘 위험이 따른다. 여행하는 동안에 위험한 일을 당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병이 들 수도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집을 떠나오면 집에서 살 때보다도 모든 면에서 열악하다. 그렇기에 장기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경우에는 비상 식량도 필요하지만, 비상 약품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비상 약품으로 감당을 못하는 병에 걸릴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비상약품이 있고 병원이 가까이 있어도, 병든 사람에게는 병이 호전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 안내인이기도 하고 순회전도단의 많은 짐을 담당하는 마부 두 명이 다 병이 들면 여행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병이 낫기를 기다리며 상주에서 지체를 했다. 설상가상으로 여행을 위한 심부름을 시키기 위해 데려온 소년까지도 병이 들어 배위량은 그런 답답한 마음을 5월 1일에 용궁에 도착해 쓴 일기에서 “5월 1일, 월요일 밤 – 용궁 읍내 […] 하인 두 사람이 병이 나서 오늘 아침까지 상주에서 지체하였다”라고 썼다. 이 두 사람은 병이 들어 낙동에 남겨둔 마부가 아닌 또 다른 마부 한 명과 배위량이 순회전도 여행에 데려온 소년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상주에서 여행을 지체하다가 마부는 병이 낫질 않아 그 마부를 상주에 남겨 두고 떠나기로 결정하고 상주에서 다른 마부 한 명을 고용했다. 다행히 소년의 병은 차도가 있어 배위량은 5월 1일에 상주를 떠나 예천 용궁에 들어 왔다.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말 중에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란 말이 있다. 그 말은 어느 누구가 어떤 사람이 급히 필요해서 급한 걸음으로 찾아 갔는데, 찾아간 날이 마침 장날이라 그 사람이 집에 없어, 그 필요한 사람을 필요한 때에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시골에서 장날에는 사람들이 필요한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그러니 장날에는 그동안 가꾼 채소나 곡식을 팔아서 필요한 생활용품을 사 온다. “거름지고 장에 간다”는 말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  장에 내다 팔 것이 있어 그것들을 남자들은 지게에 지고, 또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모두 장으로 간다. 그런데, 게으른 사람은 장에 내다 팔 것이 없다. 그런데도 장에 가야만 사람 구경도 할 수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날 수 있으니, 거름이라도 지고 장에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 것처럼, 마음 급한 배위량의 속을 이번에는 비가 썩였다. 용궁에 도착한 그날 밤에 밤새도록 비가 왔다. 요새 같으면 비가 오든 말든 기차나 버스로 여행을 떠나면 된다. 그런데 1893년 당시에 비가 오는 날 길 떠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위험과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더욱이 같이 출발한 소년도 길에서 생긴 노독으로 병까지 얻어 상주에서의 쉼을 통해 병에서 나았지만, 완쾌된 몸이 아니다. 상주에서 마부 한 명을 다시 고용해 데려 왔지만, 그 마부 한 명으로 비속에서 안전하게 가져온 여행 필수품을 말에 싣고 여행을 안전하게 행할 수가 도저히 어렵다. 그래서 배위량은 용궁에서 비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별다른 큰 변화가 없이 일상생활을 살아간다. 그러나 시골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날씨에 민감하다. 한국에서 4-5월은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다. 비가 많이 오면 강가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편함이 많다. 비가 많이 오면 나룻배도 건너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래서 시골 학교는 날씨에 아주 민감하다. 필자가 학교를 다녔던 유년시절에는 나룻배가 강을 건너지 못하면 학교 쪽 지역에는 마을이 두 곳 밖에 없었고, 강 건너편 지역에는 마을이 56개 마을이 있어 학교가 정상적으로 열리지를 못했다. 특히 필자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고향 마을은 학교 길이 십여 리가 되었고 외딴 마을이고 강변으로 난 길이 길었다. 그 길은 비가 많이 오면 물에 잠겨 학교에 못 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당시에는 전화도 없었고 학교 간다고 나왔다가 강변까지 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허다했다. 요행이 길은 물에 잠기지 않아 학교 건너편까지 왔는데, 그동안에 강 윗지방에 비가 더 많이 왔는지 강이 범람해 나룻배가 강을 건너지 못해 다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잘되었다하고 동네 상급반 형들이 동네 아이들 20여 명을 강변에 심겨진 야정 마을 버들 숲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놀며 도시락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배위량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위대한 선교사이고 신앙에 투철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인간의 한계 속에 있었다. 그는 마음을 원이지만, 길을 떠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함께한 순회전도 여행단의 단장으로 머물러야 할 때를 알아 용궁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3일 정오까지도 비가 왔던 것 같다. 그 때까지 그는 용궁의 주막집에 비그치기를 기다리며 공부를 하고 책 번역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번역한 책은 출판해 한국인들을 위한 신앙 훈련 교재가 되었고 전도용 책자로 팔기도 했다. 그는 나가야 할 때와 머물러야 할 때를 잘 구분했다. 이런 배위량의 모습은 지도자로서의 좋은 품성과 태도이다. 배위량의 지도자로서의 품성과 자세는 무리하게 자신의 계획을 몰아붙이지 않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두고 참조하지만, 반드시 필요할 경우에는 자신의 의지를 관찰한 것 같다. 3일간 비가 온 뒤에 시간이 벌써 오후가 되었는데, 용궁에서 풍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용궁을 다녀온 여행자는 잘 알겠지만, 용궁은 낙동강과 휘둘러 흐르는 내성천과 금천이 용궁 땅을 적시며 흐르는 지역이다. 그러니 비가 오는가, 날이 맑은가는 용궁사람들이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용궁에서 풍산으로 가는 길에 필자는 지금까지 3가지 노정으로 순례를 했다. 첫째는 그 길을 자동차나 버스로 용궁에서 개포를 거쳐 예천을 거치고 호명을 거쳐 풍산으로 갔다. 도보로는 두 번째 길과 세 번째 길을 걸었다. 두 번째 길은 용궁에서 개포를 거쳐 예천으로 가서 예천에서 호명을 거쳐 풍산으로 갔다. 세 번째 길은 용궁에서 내성천을 건너 바로 호명으로 가서 호명에서 풍산으로 갔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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