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1) 한국교회의 첫 선교사 이기풍 목사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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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주의였던 윤함애, 순종함으로 결혼

남편 사역 위해 적극적으로 후원·협력해

윤함애는 몇 달 후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을 본 사람이 부모에게 “양코배기가 처녀의 몸에 손을 댔다.” 고자질해서 외출복을 빼앗기고 방에 감금됐다. 그러나 성경책 한 권만 허리춤에 묶고 남자분장을 한 채 집을 빠져나왔다. 

15일 만에 평양에 도착한 윤함애는 거지꼴이었고, 도착할 때는 발에 동상으로 피가 나서 하얀 버선에 벌건 피가 물들었다. 윤함애는 마펫 선교사를 찾아갔을 때 마펫 선교사 부부는 반가이 맞아주었고 기도 후 이길함(G. Lee) 선교사의 양녀가 되었고, 6년 동안 평양 숭의여학교에서 제1회로 졸업했다. 평생 주를 위해서 독신으로 살 것을 결심했다. 

어느 날 마펫 선교사가 결혼을 권했다. 이기풍이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아내와 사별하고 갓난쟁이 아기로 인해 신학을 계속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주를 위해 그가 신학을 잘 마치도록 결혼해 도우라는 것이었다. 독신을 결심했던 윤함애는 마펫 선교사의 말에 금식 기도하던 중 “함애야, 함애야, 네가 이 십자가를 져야 한다. 네가 이기풍과 가정을 이뤄야 한다.” 이후 윤함애는 너무 험한 제주선교에서 이기풍 선교사가 흔들릴 때마다 끝까지 순종하도록 붙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윤함애는 결혼 전 서양 의술과 기초적인 산파술을 배웠다. 제주에서 이기풍 선교사가 전도할 때 가까운 동네 산모의 출산을 도운 것이 소문이 나서 동네 사람의 산파 역할을 했다. 그뿐 아니라 몹쓸 병에 걸려 죽은 동네 사람의 시신을 정성껏 처리해 주고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이기풍 선교사와 윤함애 사모의 딸, 이 사례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삶은 “헌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이었다. 이기풍 선교사가 병환으로 전라도로 사역지를 옮겼을 때도 나병 환자들을 반겨 먹을 것을 내주며 그들을 섬길 준비를 항상 했었다. 이런 섬김 후에 산상 기도로 그 영혼을 하나님께 맡겨드리곤 했다. 또 윤함애의 유언장에도 그리스도와 교회를 향한 헌신적인 신앙이 담겨 있었다. 

윤함애는 당당하게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졌다. 그녀는 체험적인 신앙인이었다. 그녀는 기도와 사랑의 수고와 봉사의 여인이었다. 항상 머리맡에 돌림병 치료 상자, 조산을 위한 가방과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 누가 찾으면 벌떡 일어나 가서 도왔다. 남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협력했다. 부부가 함께 사역함으로 전도의 열매를 더 얻었다. 이기풍 목사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이렇게 예수를 전파했다.

이기풍 목사가 낡고 헌 자전거를 타고 벌교와 무만동, 잣고개, 낙성, 낙안 다섯 곳을 두루 다니며 새벽부터 밤까지 전도하기 위해 이 마을들을 두루 다녔다. 또 목사관이 산꼭대기에 있고 대문이 없어 수시로 소록도에서 나온 한센병 환자들이 윤함애를 찾아와 밥을 먹었다. 윤함애는 이들을 반겼으며, 동리에서는 이기풍 목사의 관저를 ‘환우들의 식당’이라고 불렀다. 

이런 섬김 후에는 항상 기도로 그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했다.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 윤함애 선교사에게 표창했다. 1962년 12월 25일 신여성으로 평생 이기풍 목사를 도와 헌신한 윤함애 선교사는 84세로 소천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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