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오동해 아우의 거듭난 신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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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띠 오동해 집사는 1939년 9월 일본에서 태어났다. 어린 날 나와 함께 일본에서 자랐다.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살 때 나는 동생과 또 하나 어린이와 일본 강물에 멱 감으러 갔다. 시퍼런 강물에 멱 감을 곳이 없었다. 나는 혼자 강가 강물에 들어가니 모래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재빨리 내민 나의 손을 아우와 다른 어린이가 잡아주었다. 하마터면 나는 시퍼런 일본 강물의 익사자가 되어 일본바다로 흘러 갈 뻔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아버지는 1944년 여름 할머니 병세가 위독하다는 숙부의 국제전보를 받고 우리 가족을 데리고 고향 경남 함양 마천으로 귀국했다. 할머니 병세는 회복되어 다시 일본 야마구찌로 가려다 8·15 광복을 맞았다. 엄청난 가난 속에 나와 아우는 마천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느 날 오후 우리집 마당에서 작두놀이로 풀을 썰다 나는 그만 아우의 오른손 손가락 두 개를 잘랐다. 참으로 큰 사건이었다. 병원도 없는 마천에서 잘린 손가락 접합수술도 안 되었다. 성인이 되어 사는 오늘날까지 나는 아우를 볼 때마다 죄책감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솟는다. 

서울에서 숙부 밑에 강문(현 용문)중학을 졸업하고 부산 동아고교로 진학했으나 가정의 생계가 어려워 신문배달, 아이디얼 미싱 직원 등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나와 함께 어린 누이동생 셋의 교육에도 힘을 쏟아주었다. 

부산에서 생활이 어려워 한참 고생할 때 나는 진해 해병생활에서 알게 된 박주봉 장로에게 아우 취직을 부탁했다. 박주봉 장로는 예비역 중령으로 회사 대표직에 있었다. 하나님 은혜로 1982년도에 세명금속회사 영업부 직원이 되면서 아우는 서울로 이사왔다. 

그때까지 술 담배를 즐기던 아우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성품은 착하고 온유 겸손한데 술 담배를 즐겼다. 나와 어머니, 누이동생들이 교회 나가라고 전도했다. 아우는 “형이 취직시켜 주었다고 교회도 강요해요” 하면서 처음엔 거절했다. “회사 사장님이 장로요, 아우를 추천한 나도 장로이니 너는 교회라도 나가야 너의 도리가 되지 않겠느냐?”라고 계속 권면해 아우는 내가 출석하는 강서구 화곡본동에 있는 화성교회 교인이 되었다. 교회생활을 잘 하더니 심하던 술 담배를 다 똑소리나게 끊어버렸다. 헌금 집계 봉사를 하면서 남전도회 일도 열심히 했다. 장로만 맡던 남전도회 회장을 파격적으로 추대 받아 오동해 집사가 맡으면서 남전도회를 크게 활성화시켰다. 가정에 부인도 권사, 큰딸도 캐나다 어느 대학의 교목이 되고, 아들과 막내딸은 집사로 잘 봉사하고 있다. 

지금은 안양에 사는 거듭난 아우를 매주일 40여 년간 만나며 화성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마음이 참 기쁘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린다. 아우 가정에 주님 축복을 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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