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이슈] 한국교회 목사 열전 (1) 한국교회의 첫 선교사 이기풍 목사 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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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장 추대돼

사역서 많은 사람 영적 구원·병고침 받아

1914년 8월 15일 제4회 노회가 광주군 양림동 숭일학교에서 개최하니 제주 전도는 노회가 담당 경영하되 전도 목사 1인을 더 파송해 1인은 제주에서 1인은 대정에 위치를 정하게 하고 경비는 1천여 원으로 노회의 교회 감사 연보 3분의 2와 성탄 주일 연보로 충당했다.

동시에 1914년 8월 전라노회는 총회로부터 제주선교를 위임받았으므로 첫해부터 예상했던 933원을 모금했다. 전라노회는 1914년 9월에 모인 총회에 헌의해 “제주선교의 완전 위임과 감사절 연보의 3분의 2를 제주선교비로 사용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기풍 목사는 제주 전역의 선교를 혼자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고 교인들이 증가해 일들이 쌓였으니 그는 감사했다. 과중한 사역으로 이기풍 목사가 약해졌다. 이후 광주 북문안교회에 청빙 되어 초대 한국인 위임목사로 부임하고 장로 2인이 되는 당회를 조직했다. 다시 광주 제중원(기독병원) 원목, 순천의 중심인 순천읍교회와 가는 곳마다 부흥성장을 일궈냈다. 1920년에는 제6회 전남노회장, 192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장에 추대됐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오기 전 모이던 이호리 공동체(1904년) 성내동교회(1910)가 새롭게 출발했고, 금성리 공동체(1907)도 교회의 면모를 갖추었다. (1908) 또 조천교회(1909) 성읍교회(1910), 모슬포교회(1910), 중문교회(1910)가 세워졌다. 이기풍 목사에게 전도받고 신앙인이 된 이들이 이기풍 목사가 떠난 후에 세워진 교회들은 한림교회(1915), 고산교회(1916), 용수교회(1918)였다. 

성내교회에 남녀 소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교육했다. 선교사와 목사들, 의사들을 계속 초청해 제주인들의 영혼을 깨우치며 질병과 미신을 타파했다. 

건강 악화로 3.1 독립운동에 전혀 나서지 못했다. 이후 다시 목회를 계속했고 1921년 총회장을 역임했다. 1927년 다시 제주에 가서 제주선교를 열심히 했고, 1932년 돌아와 전남 순천지역 중심으로 목회했다. 이기풍 목사는 약하고 어려운 교회를 다니며 목회했다.

그는 성령 충만한 전도자였다. 제주도와 전라남도 섬지방을 대상으로 한 전도자요, 목회자였다. 이기풍 목사는 복음을 믿으므로 얻는 능력을 전파했다. 이기풍 목사의 사역에서 많은 사람이 나음을 입었고, 영적인 구원을 받았다. 

이기풍 목사의 1937년 10월 마지막 목회는 전남 여수 남쪽섬에 있는 우학리교회였다. 돌산, 안도 등 인근 섬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기풍 목사가 우학리교회를 담임했을 때 일제의 박해가 심했다. 1937년 일본은 내선일체를 위해서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이기풍 목사는 끌려가는 교우들에게 “여러분, 신사에 절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안됩니다.” 그때 일본 경찰은 총 개머리판으로 이기풍 목사를 후려쳤고 구둣발로 찼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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