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리더] 사람을 살리라는 하나님의 명령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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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 세모녀 자살사건을 접하면서 생활고에 못이겨 자살을 선택한 아픈 이웃에게 한발먼저 다가가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무관심의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삶을 돌아본다. 특히,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내는 위기청소년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고후 5:14)는 말씀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한 사람이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살아난 것이다  

보육원에서 13세 소녀는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통고되고 보호처분을 받아 죄를 범함이 없이 6호시설, 소년원에서 생활하며 18세가 되었다. 그동안 배운 것이 없어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네일아트를 배워보고 싶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 왠지 세상이 무섭고 두렵기만 하다. 이처럼 스스로 범죄자라 낙인찍고 숨어 살아가며 죽음을 생각하는 자립준비청년이 적지 않다.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은 죄인이라 외치면서 죄를 사하여 주심에 감사해 생명까지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겠다고 새벽마다 고백을 한다. 그러나 허공을 가르는 메아리로만 남았다. 어린 죄인을 바라보며 비판만 하고 옥에 갇힌 자에게 한 모금의 물을 주는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제 “교회라는 함수에 세상사람을 집어 넣으면 그리스도인이 나와야 한다”는 말에 세상사람들은 “구라쟁이”가 나온다고 답한다. 실천함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꼬집는 이야기일 것이다.

알렉산더 버트야니는 “무관심의 시대”에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라는 예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잘 이야기해 주고 있다. 한 노인이 해질녘에 해변을 따라 걷다가 조금 떨어진 해변에서 불가사리를 주워 바다로  던지고 있는 한 소년을 보았다. 노인은 불가사리를 왜 바다에 다시 던져주는지 물었다. 소년은 “불가사리들이 여기 해변에 너무 오랫동안 있어서 다 죽어가고 있다”고 답했다 노인은 “얘야, 모래해변에 수천 개의 불가사리가 있는데 네가 여기서 이렇게 애를 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니?”라고 말했다. 소년은 손에 들고 있는 불가사리를 다시 바다에 던지면서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년은 대답했다. “여기 불가사리에게는 삶과 죽음의 변화가 생겼잖아요”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위기청소년은 불가사리의 모습과 매우 너무나 닮아 있다.

이것이 사명이다. 즉, 사명은 네 명 이상의 사람을 살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각되었다. 사도바울은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라며 이를 위해 생명조차 귀히 여기지 않겠다고 했다.(행 24:20) 복음이란 주님께서 죽으시고 나를 살렸다는 기쁜소식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다. 그 땅끝은 내가 서 있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땅끝에서 바라보면 무너진 가정의 아픔을 품은 청소년들이 어찌 할 줄 모르고 거절당함의 무게에 짓눌려 낙심하고 낙담과 절망, 좌절, 포기, 죽음이라는 압박감에 “이번 생은 아닌것 같다” 말을 하곤 한다. 마음을 공감해 주고 용기를 주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 필자도 청소년시절, 하루 아침에 집이 망했다. 싱크홀이 생겨 지하로 끝없는 추락을 상상했다. 그때 찾아온 청소부 아저씨는 “맛있다”, “할 수 있다”, “잘될거야”, “걱정마”, “가자” 하시며 포장마차를 큰길가 극장 옆에 세워 주셨다. 용기를 잃지 않고 희망을 가지며 살아갈 수 있었다. 

불가사리를 던지는 소년, 용기 준 청소부아저씨를 닮은 사람이 되고자 소년원 공무원이 되었다. 하나님사랑은 이웃사랑, “위해”가 아닌 “함께”하는 이웃사랑을 실천해 어두워진 세상의 빛과 맛을 내는 소금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칭찬받는 참 제자 되길 원한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이기고 좁은 문을 향해 성령충만함으로 나아가길 기도한다.

윤용범 장로 (경기중앙교회)

•청소년행복재단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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