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삼성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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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설 총장 재임(1985-1992) 기간은 전두환 정권 말기로부터 노태우 정권 기간으로 국가적으로도 매우 혼란한 때였다. 유신 완화로 해외여행 자율화, 통행 금지 해제, 스포츠 육성 등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3S(Screen, Sports, Sex) 정책을 폈으나 사회는 영적으로 타락하고 7년 단임, 대통령 간선제의 호헌(護憲)선언 때문에 1987년 6월의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었다. 더구나 교주형(敎主形) 사립대학 이사장의 대학 사유화 비리가 학원 민주화 운동을 거세게 일으키고, 학생회와 교수협의회, 직원 노조의 목소리가 높았다. 나는 이 와중에서도 학교 행정에는 무관해 비교적 시달리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교회에서는 도미 전에 준비했던 장로 장립을 마치고 교회 청년부를 맡아 토요일 오후 6:30에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했으며 1986년부터는 교회 재정 장로가 되어 매월 제직회 때 회계 보고하는 양식을 전산화(電算化)했다. 수입(Revenue)은 R1, R2… 식으로 항목을 나누었고 지출(Expenditure)은 E1, E2… 이런 식으로 분류했다. 현재 우리 교회는 월말 재정보고를 <수입부>나 <지출부>에서 영문은 뺐지만, 숫자 코드는 그냥 쓰고 있다. 잘 전산화된 교회 재정보고서 양식을 갖다 쓸 수 있는데 오히려 번거롭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늘 십일조 낸 사람의 명단을 주보에 발표해서 ‘없는 사람 기죽인다’라고 불평하는 교인이 많은데 이것은 개인 고유번호를 주어서 고유번호로 헌금 수납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유번호로 헌금을 수납하면 교인 간의 이화감도 없어지고 연말에 교회 헌금의 연말정산에도 편리할 터인데 또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든 나는 당시 학교보다는 내 개인의 삶에 더 충실했다. 대학신문 주간을 했기 때문인지 가끔 신문사에서 사설을 부탁하거나 칼럼을 부탁할 때는 성실히 응했다. 또 지방 문학지에서 원고 청탁이 오면 기쁘게 따랐다. 그것이 마음의 평안을 주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내 옛 교수 친구들은 대부분 교무위원이었지만, 오랫동안 보직하고 있어 꽤 생활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집도 있었고, 또 학교 주변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직장 수입 외에 부동산값의 폭등으로 정년 퇴임 후 생활에 걱정이 없는 듯했다. 두 자녀를 연연으로 결혼시켜 힘이 빠져 있는 내게 아내는 우리도 시내 아파트로 옮겨보자고 말했다. 50여 평의 땅이었지만 나도 학교 주변이 철로 위로 가교가 생기고 대학가에 학생촌이 생기자 집값이 올라 그 땅이 효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모두 아파트에 나가 살고 있는데 우리만 이곳에 있을 수 없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아파트 붐이 생겨서 다 편리하다고 그곳으로 옮겨 가는데 할 수 있다면 나도 어머니와 아내를 위해 학교에서 좀 떨어져 있어도 옮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바쁘지 않아서 나는 이 시골 작은 집을 팔아서 아파트에 옮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시내에 아파트 섭렵을 나섰다. 아파트 붐이어서 분양이 안 된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교통이 붐비고 시끄러운 곳이 나는 싫었다. 그러다 우연히 오류동에 있는 삼성 아파트를 가보게 되었다. 서대전역 근처여서 시끄러운 곳이었다. 그런데 그 단지 중앙에 있는 이층집이 아직 비어 있다는 것이었다. 가서 보니 건물들에 둘러싸여 오히려 조용했다. 아내는 그 집을 계약하자고 서둘렀다. 그렇게 해서 내 두 번째 집은 삼성 아파트의 이층집이 되었다. 내가 놀란 것은 이 아파트값이 우리 집 매맷값의 반 좀 넘는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재테크라고 부동산을 좋아하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주택은행에서 천만 원을 빌려 8년간 194회 빚을 갚고 있었는데 그때는 매월 내는 이자가 원금 상환액보다 5배는 많았다. 그런 은행 빚을 다 갚고 나는 새 아파트로 옮겼다. 내가 살던 땅이 효자 노릇을 한 것이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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