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내게 두려움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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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즉 버스나 전철에서 이젠 방역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니 이만저만 시원한게 아니다. 지난 3년동안 코로나-19 감염 통계수치가 오르고 내리고 하는데 따라 방역조치가 강화되었다가 완화되고 하면서 우리는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을 견뎌야만 했다. 코로나-19가 물러가도 이 땅의 백성들에게 다른 두려움의 그늘이 적지 아니 남아있다. 

사흘이 멀다 않고 북한의 김정은이 하늘로 쏘아 대는 갖가지 로켓 유도탄이 우리네 두려움의 원인 가운데 가장 큰 편에 속하겠으나 이런 도발이 하도 여러 날 계속되다 보니 오히려 공포감이라 할 만한 것이 줄어드는 감이 있다. 따져보면 6.25사변 후 우리가 하루도 북으로부터의 전쟁위협을 벗어난 적이 없어 일종의 면역상태에 빠져 있던 중에 북한이 21세기에 들어와 핵무기와 장거리유도탄 개발에 매달리니 오히려 남한의 정부와 국민에 안보 경각심을 북돋고 한미군사동맹을 강화시키고 있다. 

다른 쪽의 두려움으로 대한민국 여성들의 합계출산율 0.78이 있다. 작년부터 시작된 인구감소에 따라 병역징집 자원이 급속히 줄어드니 이는 북한의 ICBM, 장사포 만큼 심각한 장래의 안보위협요인이요 또다른 국민적 차원의 두려움을 조성한다. 지구온난화 속에 자연재해가 늘어가고 폭증하는 산업폐기물과 생활쓰레기로 인해 생태계 파괴는 걷잡을 수 없어 국가레벨의 두려움을 안겨준다. 치솟는 물가와 공공요금 인상은 가정주부들을, 그리고 줄어드는 일자리는 취업준비 청년들을 두려움으로 몰아간다. 

누가 뭐래도 두려움의 극단은 죽음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했고 따라서 살아있는 누구도 그것이 어떤 시간적, 공간적 상황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언젠가 맞이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슴 속에 잘 억누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첫째로 죽음이 나만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매우 공평한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건 보통 사람들의 경우이고 신앙인은 천국의 약속에서 평안을 얻는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동기로서 가장 직접적인 것으로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을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 북한의 핵무기 그리고 오늘 여야간의 극한대립상황으로부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의연한 모습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시편(27:1)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는 고백이 있고,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고 하는 지상명령이 담겨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기는 체험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어간다면 더없이 좋겠다.  

예수님에게도 두려움이 있어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며,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절규하셨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을 이기고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아이가 무엇이 두려워서 몸을 옴츠리면 부모는 아이를 가슴에 꼭 품어주고 그러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두려움을 벗어나는 길은 자기보다 강한 보호자에 의지하는 것이 상책이다. 두려움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심리상태요 그 원인과 맞서 싸워서 이기면서 인생의 조각조각을 맞춰 나아가야 한다. 먼저 무엇이 나의 두려움이 되는가 똑똑히 알아내고 그것이 나보다 크고 센 것일 때 보호자이신 예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끌어내면 된다. 

김명식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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