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고아들의 벗, 사랑과 청빈의 성직자 황광은  목사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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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 2> 

어머니와 며느릿감 ①

“미망인 김유선 여사는 보통 분 아냐”

아버지 황도성 장로 유머 풍부한 어른

길가에서 전도지 나눠주는 일 유일한 낙

어머니 끝내 광은의 결혼식 못보셔…

황광은 목사의 형 황태은 장로는 ‘인간 황태은’을 쓸 때 엮은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동생 광은 목사가 사회에 조그맣게나마 기여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내조의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망인 김유선 여사는 보통 분이 아니지요.”

승국 어머님,

하나님의 따뜻하신 사랑과 은총 속에 온 가족이 언제나 평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랜만에 그리웠던 고국에 오셔서 반가이 만나뵈온 지도 어느덧 2개월이 지내었구려. 이곳에 오셔서 짧은 시일 동안 너무 바쁘게 다니시느라고 마음껏 환대도 못해드리고 그냥 보내드린 일이 섭섭하기 그지없습니다.

나는 아직도 건강이 회복되지 못해서 머리가 어지러워 편지쓰기도 힘든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제야 겨우 몇 자 적어 보냅니다.

사랑하는 황 목사가 하늘나라에 간지도 어느덧 28주년을 맞이하게 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남기고 떠난 자녀들과 여러 가지 어려운 일 돌보시느라고 얼마나 수고를 많이 하셨는데, 조금도 도와드리지 못하여 죄송한 생각 금할 길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은혜로 도와주시는 것 감사하면서, 앞으로 더욱 풍성하신 은혜로 가정에 채워주시기를 항상 기원하고 있습니다.

여기 지난번 오셔서 찍은 사진 몇 장 보냅니다. 옛날 사진들 들추어보다가 황 목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 몇 장 보내드립니다. 옛날 추모하면서 위로와 평안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앞으로 다시 기회를 만드시어 고국에 오셔서 같이 기쁨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되기를 바라면서, 가정에 평안과 행복이 넘치셔서 항상 기쁨이 충만한 여생을 보내시기를 축원합니다.

   7월 16일 황태은

어머니의 장례식

한국전쟁의 전화가 기승을 부리던 1951년, 황광은이 제주도 한국보육원 교육부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 그의 가족들은 부산에 피난와서 살고 있었다.

부산시 신창동 25번지. 그곳에서 황태은 장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다. 원래 몸이 약했던 황 목사의 아버지 황도선 장로는 그때 완전히 시력을 잃어 앞을 보지 못했다. 황태은 장로는 효자여서 밖에서 지낸 이야기며 사업에 관한 이야기까지 자세하게 말씀드리면서, 아버지의 면도도 해드리고 손톱도 깎아드리곤 했다.

이런 분위기이기 때문에 황도성 장로의 손자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로 성경 서너 장을 읽어드리고 나서야 밖에 나가 놀 수 있었다. 손자들은 그때 한창 장난기가 심하던 때라 성격을 읽어 내려가다가 따분한 생각이 들면 장난을 치곤 했다.

한번은 손자 한 명이 성경을 읽어내려가다가 그 당시 유행했던 노래 ‘노란 샤츠 입은 사나이’의 가사를 읊었다. 그때 황도성 장로는 손자에게 “얘, 얘, 예수님이 노란 셔츠를 입으셨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했다. 황도성 장로는 그것이 유행가 가사임을 모를 리 없지만, 이렇게 유머가 풍부한 어른이었다.

황도성 장로는 6‧25 이전부터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그가 을지로 2가에 살 때 대문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는 일을 했다. 하루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전도지를 주며,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황도성 장로의 손을 덥썩 잡으며, “저는 한경직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한참 웃었다.

부산에 피난 온 황도성 장로는 피난지에서도 길가에 나가 앉아 지나가는 사람에게 전도지를 나누어주는 일을 유일한 낙으로 알고 있었다. 한편 건강이 좋지 못한 황 목사의 어머니 김도순 권사는 아들들 때문에 걱정이 태산같았다.

“광은이를 장가 보내지 못하고, 군에 간 정은이의 생사를 모르는 것이 한이로구나”라고 푸념하는 것이었다. 정은은 군에 나가 있으니 체념할 수 있으려니와 광은은 열여덟 살 때부터 장가를 가라고 해도 말을 안 듣는 것이다. 그런 어느 날 부산 집에 한 아가씨가 찾아왔다. 제주도 한국보육원에서 황 선생의 심부름을 왔다고 했다.

별로 급한 심부름 같지도 않은데 웬일일까 하고 집에서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뒤에 광은에게서 어머니에게 편지가 왔다. 얼마 전에 심부름간 처녀가 어떤가 하는 내용이었다. 그제서야 집에서는 그 아가씨를 심부름 보낸 이유를 알았다.

 ‘그럴 줄 알았더면 좀더 자세히 볼 걸.’

 어머니의 마음에는 아들이 원망스러우면서도 그 자리에서 즉시 회답을 썼다.

 —- 네 아내감으로는 괜찮더라.

가을이 깊어가던 그때 황광은과 김유선 두 젊은 남녀는 서로 사랑하고 결혼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그때 김유선 선생이 담임하고 있던 독수리반의 김용호는 그 당시를 이렇게 말했다.

“밤에 모두 잠이 들 무렵이면 밖에서 조용한 휘파람 소리가 나는 날이 있곤 했어요. 그러면 우리 옆 방에서 주무시던 김유선 선생이 살그머니 나가는 인기척이 들리고… 그래서 우리 개구쟁이들은 어느 날 선생님이 안 계신 동안에 그 방을 뒤져 보았지요.”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그런 방면에는 소질있는 솜씨들이라 잠가둔 서랍을 덧쇠질해서 열어 보았단다. 그랬더니 메모지 한 장이 나왔고, 거기에 낯익은 ‘큰형님’의 글씨로 “이 불쌍한 고아들의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우리 결혼합시다”하는 글씨가 쓰여져 있더란다.

“원래 ‘큰형님’의 매력 가운데 한 가지는 메모 쪽지를 건네주는 일이거든요. 나도 그런 쪽지를 받아보았어요. 그런데 김유선 선생님께 보낸 쪽지를 보는 순간 시샘 비슷한 묘한 감정을 우리 개구쟁이들 모두가 느꼈다는 게 옳은 말일 것입니다.”

둘째 아들 광은의 결혼식을 보는 것이 크나큰 소원이던 어머니는 끝내 그 결혼식을 보지 못하셨다.

김희보 목사

· ‘人間 황광은’ 저자

· 전 장신대 학장

· 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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