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상해임시정부 주역 안창호 선생과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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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우리 독립의 함성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났다. 그 영향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섰다. 초대 내무총장과 국무총리대리를 맡아 튼튼하게 살림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 그 주역이다. 도산은 외교에 능통한 이승만도 초대 대통령으로 잘 모셨다. 동지간의 갈등도 대공주의와 사랑으로 그 매듭을 풀어갔다. 미국에서 대한국민회를 조직하고 잘 이끌어 안창호 앞으로 독립자금이 들어왔다. 상해임시정부 아침 애국조회 때는 도산 스스로 지어 상해임시정부 승인받은 애국가를 앞줄에 서서 우렁차게 불렀다. 주권재민 혁명적 노래를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처럼 국민이 다 불러 독립정신이 무르익으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쳐 조국광복을 이루자는 뜻과 사상이 도산의 애국가사상이다. 1902년 이혜련 아내와 신혼여행차 또 교육학 전공차 유학의 길에 올라 미국으로 건너 갔으나 무지한 교포지도 때문에 유학을 포기했다. 그러나 덕, 체, 지 삼육의 교육정신으로 교포교육을 지도하며 교육입국론을 철저히 실천했다.

조국이 을사늑약 정미칠조약 등으로 위기에 몰리자 지하애국단체 신민회 조직차 1907년 2월 20일 제물포항으로 귀국했다. 양기탁, 전덕기, 신채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정치, 교육, 경제, 문화를 부흥시키며 항일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당시 초대 총독 데라우치 암살사건을 조작해 기독교 교인 중심 민족지도자들 105인을 잡아가는 105인 사건으로 이승훈, 안태국, 양기탁 등이 형을 살며 해체되었다. 도산은 유명한 ‘거국가’를 부르며 다시 도미해 8도 대표를 모아 1913년 5월 13일 애국교육단체 흥사단을 조직했다. 신민회 조직차 귀국했던 도산은 1907년 3월 초 선천 예배당에 들러 애국찬미가 소릴 듣고 영감을 얻어 그 길로 평양에 올라가 이틀 금식기도하고 4계절 배경의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를 지어 선천예배당에 보냈다. 올드랭사인곡의 애국가는 교회는 물론 선천일대 애창곡이 되었다. 1907년 3월 20일자 매일신보에 도산이 애국가를 지어 부른 기사가 나 있다. 광복 후 1955년 애국가 작사자를 알려 달라는 미대사관 요청에 정부는 작사자 안창호, 작곡자 안익태로 통보하려다가 이 사실을 언론에 흘렸다. 친일거두 윤치호 가문이 반기를 들었다. 내세운 역술 찬미가, 1945년 9월에 쓴 애국가가사지, 신한민보 국민가 등 대표적 세 가지 증거는 하등의 신빙성이 없었다. 정부의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도 증거자료로 접수하지 않았다. 현재 애국가를 연구한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박재순 씨알의소리연구소장, 오동춘 흥사단애국가작사자규명위원장, 임진택 애국가바로잡기국민운동상임대표, 안용환 안양대 석좌교수 등이 애국가작사자는 도산 안창호 선생으로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대전형무소, 서대문형무소 두 군데서 옥고를 치룬 순국애국자 도산 안창호 선생,  언더우드 선교사 제자로서 일제시대 새문안교회, 김규식, 홍난파, 최현배 애국지사 교인과 함께 신앙독실한 독립운동가요 애국가 작사자인 도산 안창호 선생이 지은 애국가를 우리는 4절까지 꼭꼭 다 부르는 국민도리를 다 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국가(國歌)로 꾸준히 행사 때마다 우리 애국가를 불러 왔으니 토끼해 2023년도에는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 작곡자 안익태로 공식 발표해 주길 바란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금싸라기 같은 어록을 남긴 도산 안창호 선생은 남북 8천만 한글겨레가 존경하는 대한민국 겨레의 스승이시다. 도산 선생의 나라 겨레사랑 우리 잘 본받고 따르자.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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