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평전] 바다 주권(主權)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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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삼면환해(三面環海)의 반도(半島)해양국가다. 그럼에도 우리 민족은 바다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태고(太古)때부터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이 바다와 어떠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생활하여 왔는지 역사적으로 정리된 기록 많지 않다.

그리스 등 서양 해양국가들은 세기 전부터 땅의 경우와 같이 ‘바다에 대해서도 소유성(所有性)’ 인식을 했고, 국가 차원에서도 해양주권(海洋主權)에 대한 인식을 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외부와 구분하는 ‘오케안강(Ocean River)’ 경계를 발상하였고, 그 경계 안의 해상(海上)공간은 오케아노스(Oceanus)신이 다스린다고 믿었다. 요컨대 일정한 오케안(Ocean:해양)은 육지(陸地)연장으로 여긴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영해(領海)로 발전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해역국가들은 역사시대에 들어서서도 ‘오케안’식의 해양소유 인식을 하지 않았다. 이 결과 해적(海賊)들이 설쳤다. 서양 해양국가들의 선박들이 자신들의 바다연안을 왕래하는데도 그 문제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침략을 당했다.   

15세기경의 세계바다는 당시 세계 2대 해양강대국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주도했다. 그들 두 국가는 교황의 중재로 세계 바다를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국가가 분할하는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맺었다. 이것이 최초의 국제해양법(령)인 셈이다. 당연히 여타 국가들은 반대했다. 제일 먼저 영국이 이 조약에 반기를 들었고 마침내 해양전쟁이 발발했다. 이후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영해 이외의 바다는 만인의 공유물임을 제창하면서 공해(公海)개념을 제기했다. 이에의해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무효 되었다. 그런 가운데 모든 국가들이 당시 연안 포대가 발사한 포탄이 도달하는 거리, 소위 착탄(着彈)거리인 3해리(약 5km) 이내는 연안 국가의 영해주권을 인정한다는 합의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해리는 약 1,852m이다. 착탄거리가 채택된 이유는 당시 해양 강대국이 가능한 한 영해의 범위를 줄이고 그들의 군사적 활동 자유가 해상에서 제약받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유엔국제해양법은 바다 접속 국가의 경우 일정한 바다에 대하여는 당해 국가의 주권적인 영해(領海, Territorial Sea) 로 인정한다. 그리고 각 국가 간에 영해 분규가 발생하면 시시비비를 가리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새로운 선언을 했다.  미국이 자국 연안의 어장(漁場)과 해안지대에서 연안으로 이어지는 대륙붕(大陸棚) 해저자원은 대륙붕이 끝나는 데까지 대륙붕 국가의 관할권을 행사한다는 두가지 문제에 대한 선언이었다. 이 트루먼 선언은 ‘20세기에 일어난 바다로의 분쟁 움직임’에 색다른 촉매제가 되었다. 이 선언으로 각국은 어장 이외에도 대륙붕 심해자원을 품고(매장)있는 대륙붕이라는 경제영역()을 주목하게 되었다. 마침내 세계는 UN국제해양기구들은 ‘경제적 영역(EEZ 및 대륙붕관리) 규제’를 강화하는 국제해양법을 제정하였다.

‘경제구역’의 해양자원의 관리보존에서부터 과학적 조사 활동에서 관할 당해 국가의 주권적 권리를 인정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이 중 대륙붕 개념 도입은 만약 대륙붕이 200해리를 넘어 뻗쳐 있다면 그 끝자락까지 포함한다는 뜻이다(지도참조). 

트루먼 대통령의 역사적인 이 선언 이후,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이 다시 수정되어 채택되었다. 그러나 연안국 간의 해양관할권 중첩문제가 발생하고, 이는 곧 해양을 둘러싼 각국의 해양 투쟁 신호탄이 되었다. 배타적 경제수역(EEZ)과 대륙붕에서는 당해 국가가 해저광물자원과 수산자원에 관한 주권적 권리뿐 아니라 인공섬·해상시설의 설치, 해양과학조사에 관해서도 당해 국가 관할권을 향유하는 해역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륙붕은 영해와는 달리 해양이용에 관한 경제적 이익만이 인정되는 해역이어서 대륙붕에 관한 국제 협약~수정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예를 들면 대륙붕은 K나라에 시작되었지만 그 지류가 J나라 경제구역까지 뻗친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K와 J 두 나라가 협의해야하기 때문이다(후술함). 수정주의 역사학자 E.H. Carr(1892~1982)는 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고 정의했지만 오늘의 해양역사(학)는 과거 사건에 대해 시대와 상황이 바뀌면 새로운 해석을 해야 하는 추세다. 

 

김동수 장로 

•관세사

•경영학박사

•울산대흥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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